계룡시,「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 주제어 SNS 공모 이벤트 개최 - 시민과 함께 만드는 엑스포... 8월 10일부터 20일까지 주제어 공모 -
계룡시,「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 주제어 SNS 공모 이벤트 개최- 시민과 함께 만드는 엑스포... 8월 10일부터 20일까지 주제어 공모 - 충남 계룡시는 오는 10일부터 20일까지 10일간 「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의 비전과 가치를 담은 주제어를 발굴하기 위한 SNS 공모 이벤트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는 2029년 10월 5일...
낭인[浪人]의 자회상 [6] 대전교도소에서 영등포 구치소로 이감되다,,, 운명의 시간들이 다가서고...
낭인[浪人]의 자화상 [6] 대전교도소에서 영등포 구치소로 .... 대전지방법원에서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징역 2년4개월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서울고등밥원에 항소했다. 민주헌정동지회 측에서 이택돈 의원 등 두명의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 해 주었다. 생각 이상의 중형이 선고됐지만 심정은 담담했고 나...

자유기고가/ 서인식
의자왕은 말한다.
역사를 읽다 보면, 그 기록이 언제나 진실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특히 패자의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승자의 붓끝 아래, 그들은 쉽게 왜곡되고, 때로는조롱거리로 전락하기도 한다.
백제 의자 왕 또한 그러하다.
세간에는 그를 주색에 빠진 군주로, 삼천 궁녀를 거느리며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나라를 잃은 인물로 기억한다.하지만 이 얼마나 단편적이며, 또 얼마나 무성한 단죄인가.
의자 왕은 무왕의 아들로, 젊은 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정치에 뜻이 깊었던 인물이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세금을 감하고 부역을 줄이며,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먼저 살폈다.
신라의 대야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공격하여 백제를 다시금부흥시키기도 했다.
그의 재위 초기는 백제의 마지막 황금기라 할 만큼, 분명하고도 힘 있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나라의 기운이 이미 오래전부터 기울어 있었고 오랜 전쟁과 귀족 세력 간이 분열, 외교적 고립과 국력의 쇠잔이 겹쳐 의자 왕 한 사람의 노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결국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백제는 너무 많은 것을 잃은 후였고, 의자 왕은 끝까지 항전하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항복하였다.
그 선택은 비겁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항복은, 때로는 더 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기도 하다.
백성들과 궁인들의 목숨이 달린 마지막 순간에 죽음 대신 생존을 택한 것은, 어쩌면 군주로서의
또 다른 책임이었을 것이다.
그가 항복한 후, 당나라로 끌려가 유배되었으나, 당시는 그를 예우하여 장안을 유람할 수 있도록 하였고, 말년에는 조용히 생을 마감하도록 허락하였다.
그의 죽음 후 당나라는 장례까지 치러주었다.
이는 패망한 나라의 군주에게 이례적인 일이다.그만큼 그의 인격과 통치가 일정 부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삼천궁녀’라는 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정사(正史)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이는 후대에 민간 설화 혹은 과장된 문화적 표현이, 오랜 세월이
지나며 사살처럼 굳어져 버린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한 시대의 마지막 왕을, 근거 없는 비난과 조롱으로기억해 온 셈이다.
백제를 재건하고자 했던 왕, 백성을 먼저 살폈고, 부모를 섬겼으며 형제와 우애를 나누던 사람, 그리고 명망의 순간까지 자신의 자리에서물러나지 않았던 한 인간을.
역사는 기록이기도 하지만, 해석이기도 하다.
그리고 해석은 시대에 따라, 시선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왜곡의 껍질을 벗겨내고, 진실에더 가까운 시선으로 그를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의자왕은 방탕한 군주가 아니었다.그는 고난의 시대를 끝까지 품으려 했던 사람이며, 무너지는
나라를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군주였다.
의자 왕을 다시 말하노니 조롱의 구덩이에서 꺼내어 한 나라의 마지막 군주로서, 비극의 한복판을 지킨 인간으로 바라보아야 하리라.
그제야, 백제의 진실도 비로소 되살아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