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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민족의 전통적 말과 글은 그 민족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운명을 함께 해 왔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중앙 집권세력의 달콤한 동화정책 때문에 빛을 잃어가는 자기네 고유의 말의 명맥을 이어가려고 온갖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긴 후 배달(倍達)의 얼을 지키기 위해 한글학자들을 중심으로 애국지사들이 모임을 만들어 우리 글과 말의 수호와 개발에 나선 것이 꼭 100 년 전의 일입니다. 1908년 8월 31일 결성된 국어학연구회는 그 뒤 조선어연구회(1921년) 조선어사전편찬회(1929년) 조선어학회(1931년)로 맥을 이어갔고, 드디어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1947년 조선말큰사전 발간 시작이라는 민족사의 큰 업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국어학연구회 결성 직후 나라는 망하고, 불과 30 년 후 ‘일억총전력(一億總戰力)’이라는 구호 아래 미국 영국 등 연합국과의 일전을 준비하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조선반도 동화정책을 일층 강화하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말살정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이 폐지되고 일본어 상용(常用)운동이 가정에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3 인이 투옥되어 재판을 받고 한 분은 옥사(獄死)까지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70여 년 전에 우리말과 한글이 이 땅에서 영영 사라지는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선뜩해집니다. 학교 안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노상에서 우리끼리 이야기할 때에도 항상 죄인처럼 주위를 살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딱지를 나눠 주고 학교에서 우리말을 쓸 경우 한 장씩 딱지를 빼앗는 놀이까지 시켰고, 어느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잘 쓰는 가정에 ‘국어상용(日語常用)의 집’이라는 나무패를 대문에 달아 장려했다고도 합니다.
당시의 5년제 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 졸업 50주년을 기념하여 저의 동기생들이 10여 년 전에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문집을 만들었습니다. 사범대 역사과를 나와 교육계에 투신하여 중학교 교장까지 지낸 친구는 <국어상용>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일을 소개했습니다.
중학 3학년 때 집 가까이에 있는 모교인 초등학교 마당에서 운동을 하다 마침 후배인 1학년 생을 만나 우리말로 이야기하던 중 그 학교의 일본인 교장에게 들켰다. 교복을 입고 있었던 후배 최 군은 가슴의 명찰 때문에 이름을 적혔지만 마침 사복 차림이었던 나는 가짜 이름을 대주고 그 자리를 면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곧 학교에 통보되어 최 군은 교무실에 불려가 함께 있었던 상급생이 누구냐고 조사를 받았으나 이름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학교측은 전교생을 교정에 집합시켜 최 군에게 문제의 상급생을 찾아내도록 했다. 최 군은 나와 얼굴이 마주쳤지만 모르는 척 지나가고 끝내 못 찾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 사흘 계속 교무실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의 정신적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보다 못해 나는 교무실에 가‘자수’를 했다. 심한 꾸지람은 받았으나‘자수한 양심’덕분에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광복 후 모교 학적부를 보니 품행(品行) 평점이‘을하(乙下)’로 적혀 있었다. 당시‘병(丙)’판정을 받으면 퇴교처분을 당할 정도로 교칙이 엄했다. 그 사건이 품행 평점에 영향을 주었구나.“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는 생각에 아찔한 기분이었다.
요즘도 가끔 우리 모임에서 화제가 되는 “놓고사건”이라는, 기막힌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여름방학을 이용한 근로동원 작업에서는 2인1조로 무거운 짐을 들것으로 옮기는 일도 하였습니다. 목적지점까지 가서는 한 사람의 신호로 무거운 들것을 내려놓는 단순 노동이었지만 7월 하순의 뙤약볕 아래 무척 고된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들것을 들고 간 뒤 한 친구가 무심코 “놓고”라며 뒤따르는 친구에게 신호했습니다. 바로 이때 근처에 있던 조선인 교사가 이를 듣고 추궁했습니다. “놓고가 뭐야?” 일본인이면 못 알아들을 이 간단한 한마디를 조선인 교사가 따진 것입니다. 일본의 전문학교를 갓 나온 젊은 교사와 이를 아니꼽게 생각하는 제 친구 사이에 가벼운 언쟁으로 시작한 시비가 몸싸움으로 번지고, 끝내는 흥분한 제 친구가 교사의 추궁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그가 며칠째 행방불명이 되자 당황한 학교당국은 이 일을 무마해 줄 테니 학교로 돌아오라고 친구들을 통해 연락했으나 이 친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마침내는 소집영장을 받고 바로 일본군에 입대했습니다. 함경도 나남에 있는 사단에 입대한 이 친구의 뒷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반항심이 강한 그는 군에서도 탈출해 걸어서 서울까지 와 숨어 살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학업을 계속한 끝에 교육계에 들어가 정년까지 봉직했습니다. ‘놓고사건’의 그 젊은 조선인 교사도 계속 교육계에 재직했는데, 두 사람이 광복 후에 만난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말 강요로 인한 갖가지 가슴 아픈 이야기가 많은 가운데, 우리 이름의 일본식 발음 때문에 일인 교사, 특히 교련교관을 당황케 한 통쾌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같은 반에 배상우(裵相宇)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일본발음은 ‘하이 소우’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교사가 “너 이름이 뭐야?” 하면 “하이 소우데스(はぃ, そうです)”라고 대답할 수밖에요. 이 “하이 소우데스”는 일본말로 “예, 그렇습니다”이니 “네 이름을 묻는 거야”, “하이 소우데스”가 몇 번 오갈 수밖에 없지요. 여기서 희극 아니면 비극이 생기게 마련이었지요.
남철하(南哲河) 박철하(朴喆夏) 선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발음으로 ‘남철하’는 “난데스카”(何ですか:뭣 말입니까), ‘박철하’는 “보쿠데스카”(僕ですか:나 말입니까)이니 배상우의 경우와 비슷한 희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꿈속의 일같이 느껴지는 그 당시를 웃음과 더불어 회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에게 현재 나라가 있고 우리말과 우리글을 자랑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 간단한 진리를 태양의 고마움과 마찬가지로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 평소에는 별 신경 쓰지 않는 현실이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 TIME 서울지국 기자
-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