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인 1914년 당시 은진,연산,노성 3개고을에 부여군 석성면 일부를 합친 행정구역 개편으로 논산군이 출범했다.
현재의 논산시로 승격된것은 1996년 3월 1일 ,, 당시 논산시장은 전일순 시장이 었고 국회의원은 김범명 의원이었으며 시의원은 16개 읍면동에서 한명씩 선출된 16명이었다. [ 논산읍과 연무읍은 두명씩 선출]
논산읍 {송덕빈 ,김용훈 ] 연무읍 [이석현/사망] ,서평석 ] 강경읍 [강중선 ] 성동[안연만 ] 광석 [윤종근] 노성 [신용훈] 상월 [양승직 /사망] 부적 [김영운 /사망 ] 연산 [김선중 ]두마 [김성중 ] 벌곡 [안석찬/사망] 가야곡 [유제협 ]양촌 [김용희] 채운[김행남]이며 당시에는 정당공천제는 없었고 시민들 앞에서 선거구 별로 합동 연설회가 있어 후보자들의 정견 발표 기회가 주어졌다.
소위 야당계 인사로 분류된 시의원은 필자 한사람이었고 다른 시의원들은 충청도를 기반으로한 김종필 대표가 이끄는 자민련 소속이었고 연무읍의 이석현 의원은 이인제 의원이 창당한 국민 신당 촐신이었다.
그 당시 우리 논산은 정부가 주도해 두마면 지역에 계룡대 이전을 강력 추진 해오면서 그 핵심역할을 수행한 심대평 도지사는 두마면 지역을 충남도 직할 출장소라는 아주 특별한 행정적 지위를 부여 하면서 계룡대 이주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두마면 지역은 엄연히 논산군 두마면이라는 행정적 지위를 갖고 있었으므로 해서 두마면을 논산시 지경에서 분리해서 시로 승격 시키는 것은 법률로 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충남도는 논산시에서 두마면을 떼어내 계룡시로 승격시키는 1차 정지작업으로 심대평 충남도지사의 이름으로 논산시에서 두마면을 분리시켜 계룡시로 승격시키는데 대한 논산시의회의 의견을 묻는 공한을 보내왔다.
이에 대해서 논산시의회 의원 16명이 이 문제에 대한 논산시의회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한 간담회를 갖고 논의에 들어갔다.
이미 심대평 도지사 전일순 시장의 메시지를 전달받은바 있는 시의원들은 도지사가 적극 추진하는 계룡대의 온전한 이전 추진을 내세워 만장일치로 계룡시 승격을 위한 두마면의 분할을 찬성하자는 의견들에 동조했다.
나는 발언 기회를 얻어 계룡시 승격을 위한 두마면의 논산시와의 분리 안에 도저히 찬성할 수 없다며 " 논산시라는 현재의 행정 체제로도 얼마든지 계룡대를 품어 않을 수 있다" 만일 지금 석연치 않은 정치 논리로 계룡시 탄생을 위해 두마면을 포기한다면 오늘 논산시의원 모두는 훗날 두고두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구축을 위해 고향을 팔아먹은 매향노 [賣鄕奴]로 지탄받을 것이다. 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명이 반대를 하고 나섰으니 만장일치가 성립 될 수 없는 노릇 , 결국 나를 포함한 16명의 의원들이 투표에 들어갔다. 결과는 뻔했다. 15대 1 한명 의원이 반대한다는 논산시의회 의원들의 입장이 충남도청에 진달 됐다.
그후 논산시 두마면을 분리시켜 계룡시로 승격시키는 대역사가 일사천리로 시작됐으니 일생일대의 통한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당시 함께 했던 선배 동료의원 그누구도 자신은 계룡시 승격문제에 대해 찬성한 일이 없다고 강변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쓴웃음을 금치 못한다 }
나는 논산시의원 시절 지역을 위한 나름의 소명감을 갖고 몆가지 논산시 발전 방안을 집행부에 제안 했다.
연산면 연산리 신암리 일원으로 추정되는 황산벌에 오천결사대의 충혼비를 세우자며 황산벌 오천결사대 충혼비 건립 추진 특별위원회 구성을 발의 한 후 현지답사의 결과물로 당시 전일순 시장에게 오천결사대 충혼비 건립 의견을 전달했다.
또 환경오염 방지 특별위원회 구성을 발의 논산 농업인의 젖줄인 탑정저수지 수질 보존에 대한 항구적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는 주장과 함께 논산시 전역에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축사 난립과 관련해 논산시를 4개 권역별로 나눠 축산 집단사육단지 운영을 통한 청정도시 논산 구현에 대한 의견을 전일순 시장에게 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적인 공동선일수 있었던 그 제안들은 모두 일개 정치낭인의 흉중의 꿈으로 치부 됐고 지금껏 아쉬움으로 남는 일들이기도 하다 .
그 당시 나는 논산시의회 최연소 의원이 었고 최다득표 의원이기도 했다. 더욱 집권당의 충남 도지부 사무처장을 겸직 하고 있었으므로 해서 나름 자부심은 컸고 몆가지 흉중의 구상은 그럴듯 한 내용도 없지않았으나 경직된 민주화 투쟁 대열에서의 몸에 밴 치기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때문 {?] 인지 그럴 듯한 의견을 제시해 놓고도 주변의 공감을 얻는데는 실패 한 감이 있다.
부드럽지 못했고 넉넉하지못했다. 말로는 정의를 되뇌였으나 오만한 치기의 남발은 정치적 운신의 폭을 좁혀 나가는 족쇄가 되고도 남았다.
한번은 전일순 시장과 대 충돌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전일순 시장이 예산 부군수 시절 특수시책사업으로 추진해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며 내놓은 농촌 사회를 중신으로한 " 쓰레기 자가소각로 설치문제 ' 였다.
농촌사회에 넘쳐 나는 생활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가구 당 한개씩의 쓰레기 자가소각로를 설치 토록하자는 것으로 일견 그럴듯 했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절대 불가한 일이었고 자칫 그를 운용했다가는 시민을 범범자로 만들고 실효성은 없어서 머잖아 반드시 처치 곤란의 흉물로 남겨질 것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고 그때 전일순 시장이 고집스레 밀어 부쳤던 상당수 쓰레기 자가소각로들은 지금껏 처치곤란한 흉물로 남겨져 있고 보니 격세 지감이다.
그때 시의회가 잡행부를 상대로 1년에 한번 행하는 행정사무감사는 지금처럼 실과소장들이 앉아서 답변하는 형식이 아니고 의원의 질문에 대해 꼬박 서서 답변해야 했고 시간 제한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행정사무감사가 있을라치면 나는 단연 모든 간부공무원들의 기피대상 1호였다. 무언가 빌미기 있으면 끈질기게 추궁했고 말을 삼가지도 않았고 공직에 대한 존중 하는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수십년이 흐른 지금껏 가슴 한켠에 그때의 치기[?] 가 부끄럼으로 남는 대목이다. [젊은날의 초상 5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