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이인제 고민은 깊어만 가는데...
이인제 그는 정치인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에 다름 아니다,
38세 젊은 시절 연고라고는 거의 없는 경기도 안양에서 추종불허의 사자후를 토해내면서 국회의원에 당선, 세상을 놀라게 했고 재선에 성공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그 당시에는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의 자질 검증을 위해 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하는 후보자 합동 토론회라는게 있었다,
서울대 출신으로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정치권에 뛰어든 그는 해박한 지식에 투철한 국가관이 섞인 명연설로 대중의 혼[魂 ]을 사로잡았다,
안양에서 재선 국회의원의 이력을 더한 그는 노동부 장관을 역임하면서는 당시 재계나 정부부처조차 가당치 않다는 부정적 시각 속에서도 고용보험 제도를 정착 시켜 그의 정치적 반대자인 유시민으로부터도 이인제 일생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민선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면서는 단번에 정치의 중심을 파고들어 대권주자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이회창 후보와의 대선 경선에 패배 하자 스스로 국민신당을 창당 500만 국민의 지지를 얻어내면서 보수의 분열을 초래 김대중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 됐다는 소리도 들었다,
스스로 창당한 국민신당이 새정치국민회의와 합당하면서 자신의 고향인 논산 계룡 금산지역구로 옮긴 이인제는 내리 4선에 당선되는 저력을 보였다 그중 한번은 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하자 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4년전 선거에서는 신예 김종민에게 1000여표 의 근소한 표차이로 낙선의 고배를 마신 뒤 꽤나 큰 충격을 받은 듯 한때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날 뜻을 비치기도 했지만 1년 전 논산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옮기면서 7선 도전을 선언 , 권토중래를 꾀한 부산한 움직임을 보여 왔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중앙정치에 매몰돼 지역구 관리에 소홀한 점이 있었다며 다시 한번 등원하면 국가 대의사로서의 소임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래 통합당이 자신에 대한 컷오프 결정으로 경선에서 조차 배제하자 분을 삭이지 못하고 가자회견을 자청 , 당 공관위의 자신에 대한 컷오프 결정은 “ 폭거 ” 라고 주장 했다, 공정한 경선을 주장했고 불연이면 잠시 당을 떠나 무소속 출마의 입장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인제의 무소속 입후보에 대한 회의론이 커져갔다 가장 가까운 측근인 박영자 전 시의회 의장마저 당의 결정에 승복할 것을 건의 했고 이제 정치인으로서 아름다운 퇴장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라는 애정어린 권고가 잇따른다는 소리도 나온다,
그래서 더 이인제의 고민은 커져만 가지만 이렇든 저렇든 결단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인제의 한 측근은 이인제 의원이 아마도 중앙당의 중앙선대위 결정 까지는 거취에 대한 결정을 미룰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이인제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는 뜻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한당 앞으로 다가온 4,15총선 , 누가 뭐래도 이인제의 거취 표명 여하에 따라 논산 계룡,금산 선거판이 요동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