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성폭력 사건 2심
일말의 정의가 있다면 중형이 선고돼야 한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 항소심 첫 공판준비기일이 오늘(11월 29일) 서울고등법원 형사 12부(홍동기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다. 전 정무비서 김지은 씨의 성폭력 피해 사실 공개증언 이후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사법적 정의 실현도 피해자 일상 회복도 멀기만 하다.
1심은 가해자 안희정을 무죄로 풀어줬을 뿐 아니라, 재판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성폭력 가해였다. 검찰 조사과정과 법원 심리과정 내내 의심과 심문은 오직 피해자에게만 집중됐다. 안희정은 “위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합의된 성관계였다”는 일방적 주장 외에 이를 증명할 어떤 직접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피해자는 일관되고 상세한 진술과 구체적 정황 제시, 수차례 자료 보완으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을 입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재판부가 피고인 안희정에게 어떠한 신문도 하지 않는 동안, 입증책임은 사실상 피해자에게 넘어갔다. 16시간 동안 진행된 피해자 법정진술은 비난과 추궁에 가까웠다. 기억이 조금이라도 단절되면 재판부는 다그치듯 채근했다. 피고인 안희정은 김지은 씨 증언 내내 차폐막 뒤에 앉아 헛기침을 했다. 수행 당시 뭔가 필요하거나 불편한 것이 있으면 하는 행동이었다. 위축되고 불안감에 떨던 피해자는, 결국 법정진술 뒤 바로 입원해 이후 재판을 방청하지 못한다.
형법상 ‘위력’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으로서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않으므로, 폭행 협박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을 포함한다(대법원 1998.1.23. 선고 97도2506 판결 등). 그러나 실제 판결에서 ‘위력에 의한 간음’이 적용되는 예는 극히 드물다. 우리 법원이 피해자가 강력히 저항했는지 혹은 피해자가 미성년자이거나 장애인인지 여부를 따지며, 폭행 협박이 현저할 때만 강간죄를 인정하듯 성범죄 인정의 ‘최협의설’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생계 업무 평가 진로를 볼모로 크고 작은 ‘권력형 성폭력’을 경험하는 여성들은, 결국 사법 정의에 호소하지 못하고 절망과 침묵으로 가해를 견디게 된다. 김지은 씨의 피해 증언에 많은 이들이 공분하며 들불처럼 일어났던 이유는,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도 이런 피해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도지사이자 유력 대권 주자로서 안희정의 권세는 막강했다. 특히 충남도청에서나 보좌진들 사이에서 그의 영향력과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공사 구분 없이 일방적으로 지시되는 업무를 24시간 수행하던 수직적 지위에서, 위력에 의한 것이 아닌 합의된 성관계를 했다는 안희정의 주장은 피해자를 또 한 번 모욕하는 비열한 언어도단이다.
“위력이 존재는 했으나 행사하지 않았다”는 저열한 말장난으로 가해자에게 화답하며 안희정을 무죄로 풀어 준 1심 재판부는,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이유를 끼워 맞춘 모해 집단이다. 또한 이후 발생할 권력형 성범죄에 면죄부를 내준 성폭력 공모자들이다. 차기 당선이 점쳐지는 대선주자였던 안희정이 만에 하나 정치에 복귀해 다시 권력을 잡을까 두려워한 보신주의적 판결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항소심 재판부는 이제 피해자가 아니라 피고인 안희정에게 질문해야 한다. 도대체 피해자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동의’를 했다는 것인지, 왜 피해 공론화 직후 잘못을 시인했다가 말을 바꿨는지, 왜 주변 참모를 시켜 피해자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조력자들을 회유 협박했는지, 사건 당시 사용하던 휴대폰을 왜 검찰에 제출하지 않았는지, 피해자가 도청에서 사용하던 수행폰은 왜 검찰 압수수색 전에 내용이 모두 지워지고 유심칩까지 교체됐는지 안희정은 대답해야 한다.
녹색당과 이 땅의 ‘김지은들’은 앞으로 진행될 서울고등법원 형사 12부 홍동기 부장판사의 항소심 재판을 주목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 일말의 정의가 있다면 2심은 안희정에게 반드시 중형을 선고해야 한다. 지난 1년간 피해 당시의 시간에 멈춰 명확한 피해 증언을 위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붙들고 있어야 했던 피해자에게, 안식과 평안은 가해자의 엄벌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절대권력자의 숨겨진 비위를 자신의 존재를 걸고 증언한 그에게 대한민국 사법부가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기대한다.
2018년 11월 29일
녹 색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