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시 가야곡면 종연리,, 탑정저수지 입구에서 가야곡면 쪽으로 향하는 도로로 좌 회 하자마자 전낙운 충남도의원의 생가로 들어서는 길섶에 우뚝하게 모셔진 두 개의 비석이 눈길을 끈다,
두 개의 비석 중 우측에 세워진 비석에는 “ 三先生 潭陽田公遺蹟碑[ 삼선생 담양전공 유적비 ]” 우측에 세워진 비석에는 “ 봉계거사 담양전공 재만숭신기적비[鳳溪 居士 潭陽田公 載萬崇信紀蹟碑” 라고 새겨져 있다,
우측에 세워진 三先生[삼선생]은 전낙운 도의원의 3,4,5대조[규헌 .동구 .한익]를 일컬음이요 좌측에 세워진 봉계거사는 전의원의 조부 전재만 선생으로 전의원의 생가에 거주하는 전의원의 부친 전충호 [86] 옹은 두 개의 비석이 세워진 연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말기 자신의 4대조가 되시는 유가의 후예였던 한익 공께서 지방 자제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사람의 도리를 밝히는 선현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종연리에 서당을 열고 원근 각지의 젊은이들을 훈도 하는 일을 시작했다,
반상을 차별하지 않고 열성을 다해 가르치자 서당이 번창 했고 , 그 아드님이신 동구 규현 께서도 대를 이어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 하셨다는 것으로
삼선생 [三先生]의 문하에서 글을 깨치고 장성해 각계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이 서로의 친목을 다지는 대동계를 결성하고 세 분 스승의 기리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뜻을 모아 삼선생 [三先生] 기적비를 건랍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부친이기도 한 봉계거사 재만공의 기적비 건립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 했다,
부친과 선대의 이웃을 돌아보는 가르침을 몸소 체험한 자신의 부친은 새로운 교육 체계가 들어서면서 농업에 일로 매진하면서 가세가 넉넉해지자 종연리를 비롯한 인근 여러곳의 산야를 매입하셨고 매입한 야산을 당시 가족이 상을 당해도 쉽사리 묘지터를 마련하지 못하는 곤궁한 이웃들에게 무상으로 제공 하는 일을 계속하셨다고 했다,
그런 혜택을 받은 이들이 날로 늘어나면서 이를 큰 은혜로 여긴이들 또한 모임을 갖고 재만 공의 은덕을 기리기로 뜻을 모아 부친과 관련한 기적비를 세운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전충호 옹은 자신의 윗대 어르신들에 대한 기적비 건립이 이어지는데 대해 스스로 옷깃을 여미면서 가훈으로 전해지는 충서[忠恕]의 삶을 살고자 했으나 늘 미치지 못했음을 부끄러워 한다고도 했다.
홍익대학 3년을 수료하고 수원농대로의 편입 과정에서 고향지킴이로 돌아서 낙향한 뒤 선대의 선영하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는 전충호 옹은 부인 김정락 [86] 씨와의 슬하에 농학 박사,세무사 , 교교감 , 사업가 , 등 6남매를 두고 있고 전낙운 도의원은 6남매 둘째로 장남이다,
한편 전충호 옹은 장남인 전낙운 도의원이 논산 시장 선거에 나서는데 대해 부친으로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산가를 묻자 " 자신은 아들의 뜻을 존중할 뿐이다 라고 말씀을 아꼈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아들이 이런저런 일을 결정하기전에 설명하는것을 보면 " 사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는 한말씀으로 무한 신뢰를 보내는 어버이의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