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읍 황산동에 유림[儒林]3보[寶]가 있다. 조선조 인조 때[1626년경] 거의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죽림서원 [竹林書院]과 임이정[臨履亭]과 팔괘정[八掛亭]이 그것이다.
전국 어디를 가나 유학[儒學]이 성했던 조선왕조시절 세워진 향교 서원이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강경읍에 소재한 임이정과 팔괘정에 얽힌 조선조 기호학의 종장 사계 김장생 선생과 그 애제자 우암 송시열 선생의 애틋한 사제지정[師弟之精]은 수백년이 흐른 지금에도 찾는이들의 뭉클한 감동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조선조의 학교였던 죽림서원 [충남도유형문화재 75호] 바로 윗편에 세워진 임이정은 사계 김장생 선생이 후학을 기르치기 위한 강학당으로 건립했다.
임이정 記에 따르면 건립 당시에는 황산정 [黃山亭]이라 이름 했던 것을 매사에 삼가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연못가에 임한 듯하고 살얼음판을 걷는듯 하라는 뜻의 시경의 한구절 ["전전긍긍 여임심연 여리박빙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을 따 임이정[ 臨履亭]이라 바꾼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보고 사계 김장생 선생의 애제자 였던 우암 송시열은 스승을 흠모하여 곁에 모시고 싶은 정으로 임이정에서 150미터 쯤 떨어진 곳에 팔괘정을 짓고 후면 암벽에 몽괘벽[夢挂壁]과 청초암[靑草岩] 이라는 각자를 새겨 넣기 까지 했다.
사계 김장생 선생이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임이정
더욱 임이정에는 사계 김장생 선생이 임이정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8대문장가의 한사람인 구봉 송익필 선생이 몸소 임이정을 찾아 제자들과 함께 노닐다 즉석에서 일필휘지한 시한구절이 담긴 친필 편액이 소장돼 있어 뜻있는 이들의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이런 기록에 의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강경읍에 소재한 죽림서원과 임이정 팔괘정은 이나라에 현존하는 유교 문화유산 중 으뜸일 터여서 강경은 젓갈시장으로서의 명성과 근대역사문화의 보고라는 위상에 더해 한국 유교문화의 본향이라는 위명이 더해 질 법도 하다.
그럼에도 문화재 당국의 관심은 미미한 터여서 건물이 파손될 때 부분적 보수에만 그치는데다 관리마져 허술해 전국 각지에서 찾는 뜻있는 이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더욱 전임 시장때부터 강경읍 소도읍 가꾸기 사업을 통해 강경읍 도시미관을 정비하고 수년전 새단장한 황산근린공원이 강경을 찾는 관광객들이나 시민들의 쉼터로 각광 받고 있는데 비해 임이정 팔괘정 죽림서원 인근에는 무허가 주택이나 건물 잔해들이 폐허를 방불케 하는 모습인데다 여기저기 쓰레기마져 잔뜩 쌓여 있어 차제에 동지역에 대한 일제 정비사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또 유서깊은 동 건물 모두 건물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어렵도록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향후 관내 행교 서원 등과 함께 임이정 팔괘정 죽림서원도 관광객 및 시민들이 누구나 들어가 볼수 있도록 새로운 관리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강경읍 황산동에 거주하는 한 주민은 강경읍이 소도읍 가꾸기 사업이 완료되어 주거환경이 좋고 옥녀봉이나 채운산 강경 포구 등과 함께 근대역사문화의 보고라 불리울 만큼 여기저기 근대유적이 산재해 있는데다 중요한 유교문화유산인 죽립서원 임이정 팔괘정 일대에 대한 정비사업이 마련된 다면 전국적인 조명을 받을 수 있는 옛과 오늘이 조화를 이루는 명품도시로 거듭 날것으로 본다며 시 당국이 이에 대한 특단적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촉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스승 김장생 선생을 흠모하여 가까이 뫼시고 싶은 정으로 임이정 150미터 건너편에 세운 팔괘정
우암 송시열 선생이 각자 한 것으로 전해지는 "몽괘벽"
임이정에서 바라다보이는 팔괘정
죽림서원
관리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시비를 들여서라도 매입해 주변정비사업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임이정 바로 밑의 볼성사나운 모습
임이정 바로 인근의 폐허위에 주민들이 채소류를 재배하고 있다. 관공객들의 눈에 어떻게 비쳐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