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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의 생활은 유유 자적했으나 심기는 불편했다. 경찰의 필자에 대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눈길은 사방에서 번뜩였고 생필품이 필요해 논산시장에 나가는 일까지 그들은 일일이 체크했다.
시골생활이 몸에 밴 아내이기는 했으나 외부와의 단절된 고향에서의 은둔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 와중에 큰 아이가 태어났다. 당시 필자의 고향집을 찾은 유바오로 선배가 중용[中庸]의 '진실로(允) 집중해서(執) 그(厥) 中을 잡아라' 는 뜻의 "윤집궐중[允執闕中]한구절을 인용해 "윤중[允中] 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렇게 두해를 보내고 더 이상의 칩거는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린 필자는 부모님이 계신 당시 논산읍 지역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취암동으로 이사해 단칸방 생활을 전전하면서 생활은 곤궁했지만 필자의 신념 하는 바를 깊은 신뢰로 보듬어준 아내와 거센 세파를 헤쳐 나가는 중에서도 둘째아이를 가졌다. 둘째의 이름을 광중[廣中]이라고 지었다.
넓은 세상의 중심이 돼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정국은 전두환 대통령의 철권정치가 계속되면서 제일야당이던 민한당은 어용야당이라는 비판에 직면했고 미국에 망명중인 김대중 선생이 귀국 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서울에서는 계속적으로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커져만 갔고 필자는 사울의 동지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행을 결심했지만 필자를 사찰하는 경찰들은 필자의 서울행을 한사코 저지했다.
가차를 타러 역에도 가지 못했다. 한번은 경찰들의 감시의 눈길을 피해 대전으로 가는 버스에 탔으나 연산검문소에 대기중이던 경찰들 7-8명이 버스에 탔던 필자를 강제로 끌어내리려는 다툼 끝에 버스가 30여 분간 발이 묶이기도 했다.
한번은 하루 종일 뒤를 밟는 경찰관들과의 실랑이 끝에 결국 서울을 향하지 못하고 그날 저녁 무렵 필자를 감시하던 책임자에게 말했다."서울 갈 생각 버렸으니 술이나 한잔 합시다. 당시 충청은행사거리 부근에 "황제" 라는 룸싸롱이 있었다.
술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종업원이 맥주를 내왔다.
" 필자가 말했다.. 어이 ! 양주 가져와!" 경찰들은 맥주를 마시고 필자는 양주를 들이켰다. 양주 한잔마시고 우유한잔 들이키고.. 좀처럼 술이 취하지 않았고 .. 그날 술값이 이십여 만원이 나왔다니 경찰관들의 부담이 컸었을 게다.[당시 책임자는 이진구 경사로 지금은 정년퇴직했다]
그렇게 철저한 경찰들의 감시가 뒤따르는 가운데 결국 필자는 서울로 상경하지 못했고 그 일은 결국 필자의 인생역정에 제일 큰 패착이었지 싶다. 당시 총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전두환정권은 정치활동규제자로 몪었던 필자를 정치규제에서 해제했다. 논산에서는 김한수 전의원과 필자 두 사람이 2차 해금자로 이름을 올렸다.
선거구는 공주와 논산시를 묶어 한선거구로 하는 중선거구였고 김한수 전의원은 민한당에 입당 했다.
그때 생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모 신문지국을 운영하던 필자를 찾아온 김한수 전의원은 민한당의 야당성 회복을 위해 싸우겠다며 함께 할 것을 요청했다.
유치송 총재를 중심으로 한 민한당은 들러리야당에 불과했다는 민심의 호된 질타를 받고 있었던 때였지만 일부에서는 명목상 제일야당이니 만큼 당에 들어가 야당성을 회복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기류도 적지 않았다.
김한수 의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민한당을 돕기로 했다.
그러던 와중에 박찬 [작고] 전의원이 3차 해금자로 정치활동이 가능해지자 김한수 전의원과 공천경합을 벌이게 됐다.
박찬의원은 정치적으로 유치송 당시 민한당 총재와 교분이 두텁기도 했으나 2차 해금자인 김한수 전의원 보다 정치적 비중이 더 컸다.2차 해금자와 3차 해금자의 차이 정도 일 것이다.
그러자 공천이 불확실한 김한수 의원은 민한당을 탈당하고 김대중 선생이 귀국해 김영삼 총재와 함께 이끄는 신민당 행을 결행했다.
김한수 전의원은 필자에게 함께 신민당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 필자는 망서렸지만 개인의 이해득실에 의해 당을 옮기는 것이 마뜩찮았다. 결국 그대로 민한당에 잔류하기로 했고 민한당 공천을 받은 박찬 후보를 도왔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그 선거는 김한수 의원의 승리로 결과 됐고 필자는 다시 정치적 낭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후회는 없었지만 정치적 상처는 컸고 정치에 대한 회의감은 큰 무력감을 가져왔다.
선거 후 당락에 상관없이 개인적 이해관계에 얽혀 이리저리 당을 옮기는 김한수 의원의 기회주의가 옳은가? 한번 선택한 당을 지키려 잔류한 게 옳은가? 라며 스스로의 입장을 강변했지만 이미 정치적인 비중은 국회의원 당선자 쪽이 커져버렸고 필자의 외침은 묻혀버렸다.
그러나 지금도 당시 필자의 선택에 대해 회한은 없다. 그 당시의 일로 필자의 정치적 입자는 모두 망가져 버렸지만 말이다.
다시 낭인생활 중 수세폐지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때 전국농민회가 출범하기 전 이미 카토릭농민회 교육과정을 이수한 필자는 스스로 논산군 농민연합회를 창립한데 이어 농민권 수호 투쟁의 첫 단계로 지역의 농민들과 연계해 대대적인 수세 폐지운동을 펼쳤고 노성항공학교 이전반대 투쟁에 앞장서기도 했다.
반대시위에 참여했던 한사람의 농민이 목숨을 앗기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던 노성항공학교 이전반대 투쟁은 무위로 돌아갔으나 전국적인 조직연대로 끈질기게 반대투쟁을 벌였던 수세는 폐지됐으니 투쟁에 앞장섰던 한사람으로 작은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