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겨울 까치집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12-28 12:51:40

기사수정
 
겨울 까치집



나쁜 일 많은 한 해가 지나갑니다. 아주 떠나간 친구들, 병마에 잡혀 고생하는 친구들, 힘겨워지는 살림살이에 지쳐가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거리를 떠돕니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이 걷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합니다. 큰 길을 피해 곁길로 접어듭니다. 햇살이 찰랑이던 골목길에도 추위가 한창입니다.

남루한 집들의 낮은 담 너머 마당에서 얼고 있는 빨래와 발의 온기를 기다리는 신발들이 보입니다. 몇 해 전이던가, 신문에서 본 백담사 무문관(無門關)앞 풍경이 떠오릅니다. 한번 들어가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문 없는 방, 자진하여 그 방에 들어간 이의 흰 고무신에 비와 낙엽과 거미줄이 담겨 있었습니다. 절대자유를 위한 절대고독의 흔적이겠지요.

세상엔 스스로 도를 닦는 사람들이 있고 하는 수 없이 도를 닦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시를 채우고 있는 고통은 말하자면 후자를 위한 장치입니다. 골목길은 제법 가파르지만 길의 끝엔 길이 있다는 믿음을 지팡이삼아 씩씩하게 올라갑니다.

그러나 기대는 대개 배반을 품고 있는 것, 군데군데 금이 간 시멘트 담벼락이 덜컥 앞길을 막습니다. 길이 이렇게 뜬금없이 끝나버리다니, 낙담하여 돌아내려와 다른 갈래로 접어듭니다. 어디로 이어진 길을 꿈꾸며 휘적휘적 오르는 길, 북풍이 얼굴로 달려듭니다. 여긴 내 영토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새 길을 보고 싶은 열망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아니 북풍의 만류가 심하면 심할수록 열망은 더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다시 길의 끝입니다. 마구 자란 풀들이 누렇게 바랜 채 바스러지고 있습니다. 한 가운데 험상궂은 몰골로 서있는 나무 조각에 “사유지! 이곳에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라고 쓰인 검은 글씨가 무섭습니다. 몸의 힘이 쭈욱 빠져 달아납니다. 얼굴을 때리던 북풍이 어느새 스며들어 온 몸이 떨려옵니다.

“사는 게 막다른 길의 연속 같아.” 병원에 누운 친구의 말이 떠오릅니다. 친구의 삶이 꼭 이 골목들 같았나 봅니다. 겨우 두 번 막힌 길을 만났다고 이렇게 힘이 빠지는데 늘 막다른 길을 만나는 삶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지친 몸을 간신히 싸들고 버스에 오릅니다. 밍크코트를 입은 중년 여인이나 검은 파카를 입은 젊은이나 추워 보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들 침묵 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일들과 싸우고 있는 듯합니다. 버스는 꽁꽁 언 부암동 언덕배기를 내려갑니다. 파란 하늘을 받치고 선 나무 꼭대기의 까치집으로 까치들이 들락거립니다. 이렇게 꼭꼭 싸매고 있어도 추운데 저 얼기설기한 집에서 겨울을 난다니 가능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버스는 길을 바꾸어도 마음은 까치집에 머뭅니다. 그러기를 한참, 아, 마침내 알 것 같습니다. 저 집의 비밀은 아무 것도 담아두지 않는다는데 있을 겁니다. 추위도 더위도 아무 것도 붙들지 않고 그냥 왔다가 가게 하는 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추워하는 건 추위를 붙들고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괴로운 건 고통과 열망을 붙들고 있어서일 겁니다. 우리가 길이 되면 추위도 고통도 다만 지나갈 것 같습니다.

마침 버스는 친구가 누워 있는 병원 앞을 지나는 중입니다. 어서 내려야겠습니다. 올 줄 몰랐다며 기뻐할 친구에게 까치집 얘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아니 말없이 손만 잡고 있어도 내 마음 속 까치집이 친구의 마음속으로 흘러들 것 같습니다. 들어온 것은 나갈 때가 있을 거고 생겨난 것은 사라질 때가 있을 거라고, 막다른 길에선 돌아설 수 있으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릅니다. 무문관을 박차고 나올 만큼은 아니어도 조금 자유로워질지 모릅니다.

나쁜 일 많았던 한 해가 지나갑니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됩니다. 새해, 길이 되고 싶습니다. 트랙터 못 다니는 경사진 땅에 호리쟁기(소 한 마리가 끄는 쟁기)가 내는 길 같은, 그런 길이 되고 싶습니다.








필자소개



김흥숙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기자,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코리아타임스에 "Random Walk"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중이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김 태길의 "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 을 영역한 것을 비롯, 1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회원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김유미 연무읍장 "존중[尊重]과 경청[敬聽]의 자세로 주민 섬긴다 , "연무읍 논산의 관문답게 가꿀것 , ..". 지난  4월  윤기암  전 읍장의  퇴임으로  공석이 된  연무읍장에 전격 발탁된  김유미  [56]사무관이  논산시 읍.면지역 중  인구수로나  면적이  가장 큰  연무읍  63개  마을 탐방을  마치고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무읍 태생의  고향면장을 ...
  2. 서원 논산시의회 전의장" 같은당 소속 국회의원 향해 지역구 현안 외면 당내 계파정치 행동대장? 직격 [ 이런때도 있었는데.......
  3. 논산시 취암동 금호고속 건너편 "전주콩나물국밥집 " 5,000원 으로 맛진 한끼 ! 김태음 전 지사도 엄지척 ! 논산시  취암동  금호고속  건너편애  위치한  "전주콩나물국밥집 " 제법 넓직한  식당내부는  청결한 가운데서도  이른아침부터  늦은 시간 까지  늘상 붐빈다, 십수년재  같은 장소에서  성업중인  이 식당의  단골메뉴는  " 단연  콩나물국밥 "  인기쨩이다,황태국밥 ,콩국수&...
  4. 충남선관위, 선거법 위반 혐의 논산시 공무원 검찰 고발,축우회회원들에 '오인환시장 만듭시다' 문자 전송 충남선관위, 선거법 위반 혐의 논산시 공무원 검찰 고발축우회회원들에 '오인환시장 만듭시다' 문자 전송충남선거관리위원회 전경충남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6·3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오인환 논산시장 후보를 지지하는 문자메시지를 발송한 논산시청 소속 공무원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23일 아시아...
  5. 논산시 의정동우회 10대의회에 강경 사법청사 신축 ,황산벌전적지 위령비 건립 추진해달라 ,,이건창 의… 제10대 논산시의회가  개원한지 한달여만에  역대 논산시의회  의원들의  친목모임인  논산시의정동우회[ 회장  서평석 [1-2대의원 ] 회원들을  의회로 초치  간담회를 갖고  시정전반에 대한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다.  역대  의회 중  선대 의원들에  대한  발빠른  예우...
  6. 논산시 포도수출작목반 김동준 대표 내년 상뭘 농협 조합장 선거 네번째 도전 할까? 상월농협 김동준 [63] 전 이사가 내년 3월에 실시되는 전국 지역농협조합장선거에서 상월 농협 조합장 선거에 재도전 입장을 분명히 했다,지난번 선거에서 자웅을 겨뤘던 일곱명의 후보 중 현 임덕순 조합장을 상대로 선전, 의미 있는 득표로 주목을 받아온 김동준 전 이사는 지난 주 굿모닝논산 김용훈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다음 선거에서 ..
  7. 논산 출신 유흥식 추기경, 韓총리 만나 "교황도 한반도 평화에 깊은 관심" 유흥식 추기경, 韓총리 만나 "교황도 한반도 평화에 깊은 관심"韓총리 "한반도 평화와 우리 사회 갈등 치유 계속 지원해달라"(서울=연합뉴스) 설승은 기자 = 한성숙 국무총리는 1일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을 공관으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고 총리실이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한 총리는 이날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