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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그레이
얼마 전 집 가까운 한국 마켓에서 쇼핑을 하던 중, 갑자기 사랑타령의 한국노래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절절한 가수의 음성과 가사에 갑자기 가슴이 오그라들고 스산해졌는데, “사랑아 미련한 내 사랑아, 버릴 수 없는 내 욕심에, 못 다한 사랑이 서러워서, 또 이렇게 운다…” 아니, 아직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을 때릴 수 있단 말인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믿어지지 않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전 가족ㆍ친척을 망라해 존경과 신망을 받으시던,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런 일은 절대 없으리라 믿었던 오직 한 명의 숙부님이 40대 초반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당연히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요. 그 옛날 S물산에 버금가는 기업체를 운영하시던 50대 초반인 숙부님이 회사까지 직원들에게 맡겨 놓고 낮인지 밤인지 어쨌든지 그녀와 야반도주를 한 것입니다.
집안에서는 어떻게 하면 숙부님을 그 여자로부터 떼어놓고 다시 집으로 모셔 올 수 있는지가 큰 과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왜 어린 나에게 그런 지령을 내리셨는지 지금도 의문이지만, B시에 있는 숙부님의 주소를 알아냈으니 날더러 어떤 모양새로 사는지, 즉 정탐을 하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을 찾은 내겐 충격, 충격이었습니다. 그 좋은 저택을 팽개치고 떠난 숙부님은 그 동안 가져가신 돈은 다 썼는지 사기를 당했는지 그녀와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런 환경에서도 행복해 보였던 표정, 절대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어린 나는 사랑이란 20~30대나 하는 걸로 알고 있었으니 이 사건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노인이 무슨 사랑이고 연애를 한담, 참 알 수 없군 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숙부님은 고혈압으로 쓰러져서야 집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좀 병이 나아질 만하니까 집안의 감시망을 뚫고 택시로 그녀에게 도망을 갔는데, 가시다가 택시 안에서 숨을 거두시고 말았습니다.
자라서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를 보던 날 나는 불현듯 숙부님이 떠올랐습니다. 전차 안의 의사 유리 지바고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오매불망 사랑하는 라라를 발견합니다. 지바고는 황급히 전차에서 내려 그녀를 따라가려 하지만 이름도 부르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졌습니다. 그 모습이 숙부님과 겹쳤던 것입니다.
조금 멋있어 보이는 러시아 남자와 촌스러운 한국 남자의 차이일 뿐, 연인을 찾아가다 죽는 사랑의 길은 같다는 생각으로 조금 숙부님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한 인터넷글방의 60이 넘으신 선생님 한 분이 수십 년 전에 사랑했던 여자를 찾아 속죄를 하겠다고 소동을 벌인 일 또한 이해가 되었습니다.
60이 넘은 그 분, 로맨스그레이 파파가 무슨 사랑타령이냐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쏟아지는 사막의 스콜 같은 것, 아니 쉽사리 그 높이 넓이만큼 만져 볼 수 없는 하늘의 구름 같은 것, 어쩌면 오래 묵은 구들장의 온기처럼 추운 날마다 몸을 덥혀 주는 따스한 얘기이지요.
그 나이면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고, 과거 속 회한으로 얼룩진 사랑의 모습을 보고도 싶을 것이며, 새로운 황혼의 연정에 가슴을 설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황혼이기에 비로소 내 사랑이 어디서 나를 부르는지, 아니면 내가 불러야 할 그 은은한 마음의 실체를 깨달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랑의 부름은 나이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