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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 관촉사 뒷편 반야산 정상에 세워진 고려조 성리학자 안향선생의 동상에 대한 철거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고려조의 유명한 성리학자인 안향선생 동상이 세워진것은 2006년 ,선생의 문중 사람들이 안향선생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2006년 3월 19일 관촉사 뒷편 반야산 자신들 문중 소유 임야에 선생의 동상 을 건립하고 임성규 시장 시도의원들이 축하객으로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가졌다,
그러나 도시공원법상 문제점이 드러나 논산시는 2006년 11월 28일자로 동문중의 ㅇ모씨를 "도시공원 및 녹지등에 관한법률 위반"으로 사직당국에 고발조치했고 2006년 사직당국은 동 사안에 대해 2006년 12월 22일자로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다,
죄는 인정하나 여러가지 정황을 참작해서 기소를 유예한다는 법리적해석이며 논산시는 이에 대해 죄가 있음이 인정된 이상 불법행위를 원상복구해야할 명분을 얻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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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산시 당국은 아무런 후속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아 시민일반의 비판여론에 직면해 있다,
이런 내용을 전해들은 시민사회에는 고려조의 유명한 성리학자인 안향선생이 후세인의 본이될수 있는 훌륭한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혈연으로보나 그 학통의 계승등에 비추어 논산과는 아무런 연고성을 찾아보기 힘든 터에 논산시의 대표적 시민공원 지역으로 시민들의 사랑받는 반야산 정상에 동상이 세워진 것은 사려깊지 못했다는 여론이 점증해지고 있다,
더욱 안향선생의 본향으로 알려진 경북 영주시 관내에 조차 안향선생의 동상이 세워진 일이 없고 영정사본만 존치되고 있음에 비추어 사직당국으로부터 불법적인 행위의 산물로 판단된 안향선생동상은 선생의 본향 등으로의 이전이 검토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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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반야산에 오른다는 취암동 거주 유모[34]씨는 어느날 갑자기 안향선생의 동상이 반야산 정상에 세워져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기왕에 당국으로부터 고발에 따른 불법행위로 판정됐다면 마땅히 철거해야 할것이라고 주장하고 논산출신으로도 조선조 예학의 종장으로 추앙받는 사계 김장생,명재윤증 선생등 명현거유가 있음에도 아직 동상을 세운바 없는데 시민들이 즐겨찾는 명소에 안향선생 동상의 존치는 명분이 없는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또동상건립을 둘러싼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임성규 시장을 비롯한 내노라하는 지역의 명망가들이 불법행위에 다름아닌 안향선생 동상건립의 제막식에 버젓이 축하객으로 참석해 놓고 수개월뒤 논산시청이 이를 불법행위로 고발을 하는 것은 논산시 행정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논산시 유림회에 소속돼 있는 김모[67]씨도 동사안에 대해 애시당초 논산과는 아무런 연고점을 찾기어려운 선생의 동상을 건립한 것 부터가 생각이 모자란 단견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이미 불법건조물[?]로 판정을 받고도 더이상 현위치에 선생의 동상을 존치하는것 자체가 선생의 위명을 깍아내리는 일일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또 안향선생의 동상 뒷편에 동상의 건립과 관련한 기록에서 논산시가 조경을 담당한것으로 명기 돼있는점에 비추어 논산시가 기 동상의 건립과 관련해서 시 예산을 지원했다면 이또한 규명돼야할 사안이고 해당문중이 동상건립의 격을 높이기위해 임의로 조각해 넣은것이라면 이는 삭제해야할것으로 본다고도 말했다,
한편 이 사안에 대해 5월 27일 굿모닝논산은 논산시청 당당부서 담당에게 2006년 논산시가 관련사항을 사직당국에 고발한 내용에 대한 사법당국의 결심이 무었인가를 묻자 담당자는 개인신상에 대한 문제이므로 알려줄수 없다는 답변을 한 반면 사법당국의 한 실무자는 당국의 최종결심사항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줘 논산시가 자신들의 행정상 오류가 드러나는것을 꺼려하는 입장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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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珦
1243(고종 30)~1306(충렬왕 32).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충렬왕 때 원나라를 왕래하며 직접 주자서(朱子書)를 베껴오고,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는 등
성리학의 도입과 보급에 힘썼다.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裕). '향'(珦)자가 조선 왕조 문종의 이름자와
같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모두 초명으로 불렀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관직생활
아버지는 밀직부사 부(孚)이며,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여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었으며, 그후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이 되었다. 1288년 우사의(右司議)·좌승지를 지내고, 1289년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었다.
11월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가 되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했고, 이어 밀직사사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2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올라 관제를 개혁할 때 집현전 태학사 겸 참지기무 동경유수 계림부윤
(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었다. 그해 8월 왕을 따라 다시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렬왕이 복위된 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올랐다.
1303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성리학의 도입과 문교진흥
고려는 고종말에 원과 화친을 맺은 이래 대대로 몽고의 간섭을 받아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이 손상되었다.
그러나 종전(終戰)에 따른 평화의 회복은 학문과 문교(文敎)의 재건을 가능하게 했다.
충렬왕 때는 이러한 문교부흥의 기운이 소생하기 시작한 시기인데, 특히 원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원나라는 이미 남송(南宋)을 멸하고 명유(名儒)를 초치하여 유학을 장려하던 시기로서 정주학(程朱學)이
북방에서도 행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안향은 이러한 시기에 원나라를 왕래하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이를 국내에 들여온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였다.
그는 1289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를 직접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眞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왔으며,
1297년에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모셨다.
또한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신서(朱子新書) 등을 구해오게 했다.
아울러 문교진흥을 위해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를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그 이자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했다.
1304년에는 섬학전을 설치하여 박사(博士)를 두고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다.
섬학전은 일종의 육영재단으로 당시 국자감 운영의 재정기반이 되었다.
학풍
안향이 전한 성리학은 당시 원나라의 학풍을 주도한 허형(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이기(理氣)보다는
심성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인의 도는 일용륜상(日用倫常) 속에서의
충(忠)·효(孝)·신(信)·경(敬)·성(誠)이라는 실천덕목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윤리를 경시하고 의리에서 벗어났다고 배척했다.
〈회헌실기 晦軒實記〉의 "내 일찍 중국에서 주회암(朱晦菴:주자)의 저술을 얻어보니 성인의 도를 발명하고
선불(禪佛)의 학을 물리친 것으로, 그 공이 족히 중니(仲尼:공자)에 비할 수 있다. 중니를 배우려면 먼저
주회암을 배우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주자가 저술을 통해
불교를 배척한 공이 높으며 공자의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주자를 경모하여 주자의 화상을 벽에 걸어두었으며, 자신의 호도 주자의 호인 회암(晦菴)의 '회'자를 따서 회헌이라 했다.
안향으로부터 시작된 성리학은 한국 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고려의 불교세력과 대항하고 나아가 그것을
압도하면서 조선시대의 건국이념으로까지 성장했다.
그가 죽자 충렬왕은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명으로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그 모사본이
현재 전하고 있다. 1319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 순흥에 그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그밖에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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