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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빛낸인물[1]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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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10-12-22 23: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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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다산은 28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이 시작됐다. 학문과 행정에서 정조의 신임을 얻으며 측근으로 활동했다. 규장각 초계문신으로서의 활동, 수원화성의 설계, 암행어사로서의 활약, 곡산부사 임기 중 지방행정관으로서의 치적 등으로 장차 정조가 중용할 것이 예상됐다. 그러나 정적들은 다산의 성장과 그에 대한 정조의 총애에 위기감을 느끼며 천주교를 빌미로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정조의 기대 아래 벼슬길 시작되다

28세 때(己酉年, 1789) 봄에 다산은 대과에 합격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 발령을 받았다. 벼슬길이 시작된 것이다. 다산의 벼슬생활은 39세, 즉 정조가 죽은 해(1800)까지 계속됐다. 정조 시절 후반기 12년 동안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신들의 품의로 규장각(奎章閣)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됐다. 규장각은 정조가 젊고 학문적 자질이 뛰어난 인재를 골라 더욱 학문에 정진하게 하고 장차 개혁의 중심세력으로 삼고자 만든 것이다.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측근으로 활동하게 됐다.

화성에 발현된 기술관료 다산의 역량

31세 때(임자년, 1792) 봄에 홍문관의 수찬(修撰)이 되었다. 4월에는 아버지가 진주 임소에서 돌아가셨다. 집에서 여막살이를 하는 다산에게 정조는 임무를 맡겼다. 정조가 기유년(28세, 1789) 겨울에 한강에 부교(浮橋:배다리)를 놓을 때 다산이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을 상기하면서, 다산에게 수원 화성의 설계도를 작성해 바치라고 명한 것이다. 신도시 수원 화성은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계획한 각별한 것이었다.

다산은 윤경(尹畊)의 〈보약(堡約)〉과 유성룡(柳成龍)의 〈성제(城制)〉를 참조하여 종합하되, 벽돌을 이용하고 성벽의 중간부분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등 독창성을 발휘했다. 그의 설계는 문앞을 반원 형태로 둘러싸는 옹성, 적군이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포루와 적루, 이를 감시하는 현안, 화공을 막기 위해 물을 쏟는 장치인 누조 등이 특징이다.

또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창안하고 활차(滑車)와 고륜(鼓輪) 등을 써서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비용을 4만냥 이상 절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반 백성을 부역으로 강제동원하지 않고 임금노동자인 모군만으로 성을 건설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 정약용

33세(갑인년, 1794) 7월에 아버지의 복을 마치자 성균관 직강으로 제수받았으며, 8월에는 비변사(備邊司)의 낭관을 맡았다. 10월에 다산은 정조의 은밀한 명에 의해 경기 암행어사가 되었다.

다산이 맡은 지역은 적성, 마전, 연천, 삭녕이었다. 다산은 민간에 암행하면서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을 직접 목도했다. 이는 시(奉旨廉察到積城村舍作 : 교지를 받들고 순찰하던 중 적성의 시골집에서 짓다)’에 잘 나타난다. 백성의 참상이 수령과 아전들의 착취로 인한 것으로 파악하고 제도를 악용하여 착취를 일삼는 탐관오리를 벌주었다.

다산은 고위직에게도 추상같았다. 암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다산이 관찰사(觀察使) 서용보(徐龍輔)의 비리를 정조에게 고했다. 이 고발사건으로 서용보는 다산에 악감정을 갖고 정조 사후 철저하게 보복하게 된다.

34세(을묘년, 정조 19년, 1795) 정월에는 특별히 사간(司諫)으로 임명되고 이어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됐다. 2월에 임금은 다산을 특별히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제수하고 화성에서 있을 대행사(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에 시위(侍衛)해서 따라오도록 했다. 정조의 다산에 대한 신임과 기대는 더욱 커갔다.

다산을 둘러싼 불안한 기운

30세(辛亥年, 1791) 전라도 진산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진사 윤지충과 그의 내외종 사촌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부모의 위패를 불태웠다하여 처형되었다. 이때 홍낙안(洪樂安) 이기경 등이 이승훈 정약용 등을 공격하고 이후로 사이가 더욱 멀어졌다.

계축년(32세, 정조17년, 1793) 여름에 문숙공(文肅公) 채제공이 화성유수(華城留守)로 있다가 영의정이 되어 들어와 상소를 올렸다. 임오년(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벽파의 모함으로 뒤주 속에서 굶어죽은 해. 다산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에 참소했던 사람(노론 벽파)을 처벌하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정국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정조는 영조의 금등지사(金縢之詞)를 꺼내 보이면서 장헌세자의 효심과 영조의 후회감을 밝혀주어 겨우 파문이 진정되었다. 비록 파문이 진정되었지만, 다산은 “우리 당(黨)의 참혹한 화란은 대개 이 사건에서 움트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 벽파는 현실적인 정치실세였다. 정조는 그 속에서 착실히 개혁세력을 성장시키면서 상황을 바로잡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빌미로 반격을 노리고 있었다.

천주교를 빌미로 한 노론의 대공세

을묘년(정조 19년, 1795) 여름 4월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변복을 하고 몰래 들어와서 북악산 아래 숨어서는 서교(西敎)를 몰래 펴고 있었다. 체포하려 했으나 주문모는 놓쳐버리고 최인길(崔仁吉) · 윤유일(尹有一) 등 3인을 붙잡아 장살(杖殺)해버렸다.

이 사건을 빌미로 노론이 공세를 퍼부었다. 목표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이었다. 정조는 곤혹스러웠다. 이들을 비호했지만, 계속되는 공세에 한발 물러나서 오히려 이가환과 정약용의 천주교 혐의를 씻어주고자 했다. 이가환을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정약용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하여 임명하고, 이승훈은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 보냈다.

금정(金井)은 충청도 홍주(洪州)에 소속된 역원(譯院)인데, 역속(驛屬)들이 대부분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다산은 금정에 도착하여 그곳의 세력가들을 불러다가 조정의 금령(禁令)을 거듭거듭 설명해 주고 제사지내는 일을 권고했다. 그리고 기호지방의 중요한 천주교도인 이존창을 체포하여 감화시켰다.

다산 36세(정사년, 1797) 정조는 다산이 천주교 혐의를 충분히 씻었으므로 중용할 때라 생각했다. 그래서 6월 다산을 동부승지로 임용했다. 이에 대해 다산은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려 천주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솔직히 밝혔다. 이 상소는 다산이 한때 천주교에 경도되었지만 나중에 버렸노라는 변명이자 고백이었다. 그러나 반대파는 이 글의 일부 문구만 떼어내 다산이 천주교 신자라는 증거라며 더욱 몰아 세웠다.

곡산부사, 지방행정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다

사직상소를 낸 다음달 정조는 다산을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특별히 임명했다. 그때 세력을 잡은 자로 참소하고 시샘하는 자가 많아 다산을 몇 년 외직(지방직)에 근무하도록 하여 그 불길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곡산에 이계심(李啓心)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백성 천여 명을 이끌고 관청에 와서 백성들의 고초에 대해 항의하다 달아난 사건이 있었다. 그 이계심이 다산이 곡산으로 부임하는 길에 나타나 백성들의 고통 사항 10여 조목을 적은 글을 바치고는 길가에 엎드려 자수했다. 옆 사람들이 체포하려 했으나 다산은 저지했다. 다산은 관청의 행정에 항의하는 태도가 오히려 관청이 밝은 행정을 하는 데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위적 지배를 부정하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주려는 목민관의 자세를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다산은 곡산부사로 있은 2년간 직접 한 고을의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 수 있었다.

정조임금의 죽음, 하늘이 무너지다

다산이 아직 곡산부사로 있던 38세 때(己未, 1799) 정월에 명재상 채제공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산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불길한 전조였다.

4월 정조는 다산을 다시 조정에 불러 형조 참의에 제수했다.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의심스러운 사건들을 명쾌하게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의 신임이 높아갈수록 주위의 시기도 높아졌다.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계(啓)를 올려 권철신(權哲身)과 다산의 형 약종(若鍾)을 사학의 죄인으로 처벌하기를 요구했다.

다산은 39세(경신년, 1800) 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마현(馬峴)의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참소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벼슬을 하지 않고 낙향하면 공격받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정조는 그를 놓아 둘 수 없었다. 다시 불렀다. 그러나 정조의 건강에 탈이 났고 보름새에 운명하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빠져있을 때,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다산에게는 이제는 아무런 보호막이 없었다.



유배시절



[요약]
다산은 정조가 죽자 정적들에 의해 사지에 내몰린다. 겨우 목숨을 건져 18년간의 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다산은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학문적 업적으로 승화시켰다.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써서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저술은 당시 조선사회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고 민(民)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귀양지로

1800년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노론 벽파들이 전권을 장악했다. 이듬해(신유년, 1801) 호시탐탐 노리던 노론 벽파는 장례가 끝나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채제공의 뒤를 이을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 정조가 장차 크게 쓰려했던 인재들이 붙잡혀 왔다. 이가환, 이승훈은 사교도라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신유교옥). 다산은 사지(死地)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18년간의 긴 귀양살이가 시작됐다.

다산의 나이 40이었다. 신중하면서도 용기를 지녔던 다산, 중앙과 지방에서 두루 행정경험을 쌓았던 다산, 장차 명재상이 될 것이 예상되었던 다산, 조선을 새롭게 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던 다산. 그러나 다산은 먼 귀양길을 떠나야 했다.

첫 귀양지는 포항 장기였다. 9개월을 지냈는데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다시 서울로 다시 압송되었다. 다산의 적들은 다산에게 혹독한 심문을 가했지만 다산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다. 다산은 다시 강진으로 유배됐다.

개인적 아픔보다 시대의 아픔에

강진에 도착했을 때, 유배초기인지라 인심은 싸늘했다. 한 늙은 주모의 도움으로 머무른 곳이 동문 밖 주막(酒家)이었다. 이곳에서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거처했다. 감시의 눈도 심했고 무고도 있었다.

다산은 주막 골방에서 머물면서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컬었는데, 42세 때 동짓날 자기가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두 번째 거처로 보은산방(寶恩山房 : 고성사)에 머물렀다. 44세 때(1805) 겨울 큰아들 정학연이 이곳에 찾아와 머물렀고, 다산은 큰아들에게 주역과 예기를 가르쳤다. 45세 때(1806) 가을 9개월 만에 다시 목리(牧里) 이학래(李鶴來)집으로 옮겼다.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다.

다산은 유배생활의 고초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독서와 저술에 열중했다. 다산은 먼저 예학과 주역을 공부했다. 경학에 힘써 당시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주자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했다. 관념론이 아닌 실천론으로서의 경학이었다.

다산은 개인적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어두운 시대에 아파했다. 사실 다산이 겪는 고초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불의(不義)의 시대에 태어난 탓이었다. 그의 시문은 민초들의 고통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농민들의 착취와 압제의 실상을 목격하고, 농촌현실에 근거한 문제의식과 그 해결을 위한 저술에 몰두했다.

다산초당에서 이룬 학문적 업적

다산은 47세 때(1808) 봄에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귤동(橘洞 : 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이다.

경학 이외에 경세학(經世學)과 다방면의 실용적인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유배 초기에는 6경 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의 저술을 마쳤고, 나중에는 경세유포,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마쳤다.

경세유표는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정책제안서이다. 목민심서는 현행법 내에서도 공직을 바로잡아 백성을 살려내려는 취지였다. 다산의 정확한 현실인식과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후기의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고 민(民)을 구제하기위한 방략이었다.

다산은 유배생활 중에도 제자들을 길러냈다. 강진 읍내에 머물면서 아전들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나중에는 그의 외가 친척들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집안의 자제들에을 가르쳤다. 이들 제자들은 또한 다산 저술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돌아가는 것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운명일 뿐

다산은 만덕사(萬德寺 : 백련사)에 머물고 있던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났다. 열 살 이상 연하의 스님을 만나 학문과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혜장은 1811년 40세의 나이로 입적하고 만다.

유배기간 중에 형 정약전이 명을 달리 한 것은 크나큰 슬픔이었다. 약전은 다산의 학문을 알아주고 격려해 주었던 지기(知己)였다. 다산은 형과 유배길에서 헤어진 후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편지와 저술을 보내 연락하고 있었다. 약전은 다산의 귀양살이가 풀릴 것이라는 말을 듣고 곧 아우를 만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해배는 이뤄지지 않았다. 약전은 유배 16년 만에(1816) 끝내 아우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동안 몇 차례 풀려날 기회가 있었지만 서용보 등 반대파의 저지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다산은 구차하게 선처를 구하지 않았다. 무익한 일이 분명한데 자존심까지 잃을 수 없었다.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를 모두 운명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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