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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노인의 전화 매너
  • 뉴스관리자
  • 등록 2009-02-15 23: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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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걸려오기만 하면 영락없이 20 분에서 30 분은 꼼짝 못하고 수화기에 매달려 있어야 할 상대가 세 사람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한 사람은 미국에, 한 사람은 일본에, 나머지 한 사람은 국내에 살고 있는 분입니다.

첫 번째의 미국에 있는 분은 거의 60 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오고 가족끼리도 서로 잘 아는 사이입니다. 저보다 나이는 서너 살 아래이지만 두 번이나 같은 사무실에서 도합 10 년 가까이 일한 직장의 선배이기도 합니다.

자녀 교육 등 이유로 30여 년 전에 미국에 정착한 이 친구는 지금도 인터넷 뉴스 사업을 경영하며 고국에 있는 옛 언론계 친구들과 친분도 유지하고 있으며 저에겐 두 달에 한 번꼴로 전화를 걸어옵니다.

그런 관계에다 이야기 내용도 신선하여 조금도 지루함이 없이 대화가 진행됩니다. 그 뿐 아니라 전화를 걸 때엔 반드시 이 시간에 길게 통화해도 지장이 없는지를 사전에 다짐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특별 할인 국제통화 요금 혜택을 받기 때문에 통화시간 길이에는 전연 개의치 말라는 이야기도 오래 전에 했습니다.

요금 걱정 없이 하는 국제전화이니 어떤 때에는 처음 용건과는 별 관계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보낼 때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련된 전화매너와 대화 요령 등으로 이 친구가 거는 전화는 언제나 반갑기 마련입니다.

두 번째 긴 전화 주인공은 초등학교 동기로 현재 일본에 영구 거주하는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일선에서 물러난 뒤 상처(喪妻) 까지 해 자기시간에 여유가 많은 친구입니다. 돈과 시간의 구애를 거의 받지 않는 데다 초등학교 때부터의 친구인 만큼 이 양반의 전화 내용은 걷잡을 수 없이 좌충우돌이어서 상대방의 사정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말만 길게 늘어놓는 품이 마치 악동시절의 대화와 비슷합니다. 게다가 이 친구 말투에는 저도 잊어버린 고향 사투리가 자주 나옵니다.

2~3 년 전까지는 한해 두세 번은 고국을 다녀갔고 그래서 서울에서 만나는 기회도 많았습니다만 요즘에는 거동이 전과 같지 않다고 여행은 줄이고 주로 두 달에 한 번꼴로 전화를 걸어 무료함을 달랩니다. 이 친구 전화는 반갑기는 하지만 전화매너가 세련돼 있지 않아 가끔 짜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괴로움을 주는 전화가 서울 근교에 거주하는 분의 경우입니다. 친구를 통해 15 년 정도 전에 알게 된 이 분은 전화매너가 수준 이하여서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혹간 손님이 있거나 바쁜 일이 있을 때 마누라가 전화를 받으면 외출 중이란 구실로 용건만 듣고 연결해 주지 않을 때도 있을 정도입니다. 우선 말하는 게 너무 느린 데다 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요령부득의 화술로 전화 받는 상대방의 형편은 전연 참작해 주지 않는 나쁜 습관이 짜증을 낳게 합니다. 전화 걸 때뿐 아니라 평소 회화에서도 이런 식으로 처신하니 주위에서 친구가 점점 멀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20세기 말에 폭발적으로 대중화한 전화는 참으로 위대한 문명의 이기(利器)입니다. 그러나 초등학생에게까지 보급된 이 전화가 공중도덕을 문란케 하고 지하철 안에서는 가까이 있는 승객에게 큰 불편을 주어 가끔 시비가 벌어지기도 하지요.

옛날엔 전화국이나 큰 회사에서 일하는 ‘교환양’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와 상냥한 안내로 젊은이들을 매혹시켜서 가끔 로망스의 주인공이 되는 예도 있었습니다.

저도 현역 기자시절에 큰 기사거리가 터지면 전화로 동경 사무실로 기사를 보낼 때가 있었습니다. 이럴 때 “여기는 서울지국입니다”하고 급한 목소리로 외치면 당장에 알아차리고 즉시 담당 책임자에 연결해주는 교환원 아가씨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다음 출장 때 그 교환양들에 대한 선물을 잊지 않은 것은 물론이지요.

이에 반해 요즘 궁금한 일이 있어 관청이나 큰 회사에 문의를 하면 녹음된 금속성 목소리로 사무적으로 “무엇은 몇 번 무엇은 몇 번”하며 기계적으로 응대하는 바람에 일순간에 정이 떨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로봇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통신기술이 발전하면서 사회생활의 효율은 높아졌지만 훈훈한 인간의 정이 끼어 들 여백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사회의 사막화를 이끄는 이러한 문명의 이기를 슬기롭게 다루는 새로운 교양의 함양(涵養)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 TIME 서울지국 기자
-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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