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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三代)가 도란도란 -『대한민국 원주민』
  • 뉴스관리자
  • 등록 2009-01-26 10: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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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다가옵니다. 새삼 명절증후군을 앓기도 멋쩍은 나이이지만 속이 썩 개운한 것도 아닙니다. 설날이면 일찌감치 시댁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오후엔 친정에 와서 세배를 드리는데, 어느 집에 가나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먹지도 않는 전은 왜 부칠까?’ ‘왜 나는 어디서나 부엌데기만 할까?’ 따위의 답 안 나오는 질문에 속이 시끄러운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애매하게 입 다물고 있는 서먹한 시간 때문입니다.

과묵한 남편을 배출한 시댁은 열 명이 넘게 모여도 큰 소리 없이 TV만 봅니다. 수다스런 제가 자란 친정은 음식이 짜네 마네를 놓고도 시끄러운 입씨름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온 가족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일이 없기는 두 집 다 마찬가지입니다.

십대의 아이들은 각자 컴퓨터와 핸드폰에 매달리고, 팔순의 부모님들은 멀뚱히 앉아 계시거나 아예 방문을 닫고 누우십니다. 대화는 한참 경제활동 중인 중년 남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그 시간 부엌에서는 아이들 교육법을 둘러싼 정보교환이 한창입니다. 삼대가 다 모였지만 다함께 이야기를 하는 일은 없습니다. 끼리끼리 모여 끼리끼리의 언어를 주고받을 뿐입니다.

밥상머리에서 정치·경제·사회·역사를 웅변으로 가르치던 아버지께서 자식들을 피해 방으로 들어가시고, 자리를 지키던 어머니마저 영어와 약어가 난무하는 대화에 하품을 깨무시는 걸 보니 가슴이 뜨끔합니다. 과묵한 자식들에 둘러싸인 시어머니는 자꾸 먹을 것을 내오라 하십니다. 심심한 입을 바쁘게 하려는 깊은 배려이나 자식들은 하나같이 다이어트 중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삼대가 한자리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해리포터보다 더한 판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 판타지가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젊은 만화가 최규석은 『대한민국 원주민』에서 보여줍니다. 이 책은 1977년 진주에서 태어난 최규석이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그린 사실적인 만화책입니다.

어르신 중에는 만화책이 무슨 책이냐고 낯을 찡그릴 분들도 있겠지만, 이 또한 삼대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선입견일 뿐임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실 것입니다. 이 만화책의 가장 큰 장점은 웃음과 눈물의 적절한 조화 속에서 남녀노소 모두의 공감을 자아낸다는 점입니다. 특히, 어른들이 하는 말은 무조건 ‘구리다’고 생각하는 십대 아이들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는 이만 한 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 소개도 머리말도 제쳐두고 본문부터 읽기 시작한 저는, 처음 몇 장을 읽고선 좀 당황했습니다. 분명 현대물 같긴 한데 이야기는 무슨 시대물을 보는 듯하여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머리말을 찾아 읽다가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저보다도 한참 젊은 이 작가가 어려서 직접 겪은 일을, 저는 아득한 옛날이야기쯤으로 치부해 버렸던 것입니다.

저를 더욱 부끄럽게 한 것은, 작가가 안타까움으로 그려낸 네 누나들의 삶이었습니다. 살얼음을 밟듯 조마조마한 가운데 간신히 진학을 하고, 열여섯 열일곱부터 공장에 다니며 벌이를 해야 했던 그의 누나들은 짐작컨대 저와 동년배거나 후배일 성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제 어머니나 이모쯤의 세대를 떠올렸으니, 민망하고 미안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더 미안스러운 것은, 그런 무거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가도 어느새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킬킬대게 되는 겁니다. 일테면,

“아들: 아부지, 미술학원을 가야 되겠심더.
아버지: 가라.
아들: 학원비가 한 달에 20만 원정도 합니더.
아버지: 그거는 내가 모리겄고, 갈라모 가라.”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아버지, 일본 선생의 명을 받아 아침마다 절을 시키는 조장에게 반항한 이야기를 한다.)
어린 아버지: 울 아버지가 절은 조상한테만 하는 거라 카더라.
조장: 너그 아버지가 선생님보다 높나?!
(이리하여 둘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다. 얘기를 들은 아들이 감동하여 묻는다.)
아들: 천황한테 절하기가 그렇게 싫었어요?
(아버지는 무슨 뜬금없는 얘기냐는 듯 쳐다본다.)
어린 아버지: 그런 거 아이다. 내가 공부도 잘하고 쌈도 더 잘하는데 선생님이 저 새끼한테 조장시킨께 썽이 나서 그랬다.”

이런 얘길 듣고서, 아버지는 왜 그리 무책임했냐든가 민족의식도 없었냐고 따지기 시작하면 삼대의 대화는 거기서 끝입니다. 하지만 이 젊은 작가처럼, 툭하면 어머니를 패고 노름으로 전답을 날린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젊어선 무당에 혹하고 늙어선 신부님을 신처럼 받드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받아들이면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계속되겠지요.

그렇다고 최규석이 끔찍한 현실을 무조건 포장하거나 “옛날이 좋았어.”라고 뭉뚱그리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과 무지로 점철된 부모님의 삶, 장남의 무게에 짓눌린 형의 삶, 빈곤에 남녀차별까지 겪었던 누나들의 삶을 하나하나 인터뷰하면서, 그는 새삼 지나온 삶의 무게에 놀라고 가슴 아파합니다.

책에는 같은 시간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식구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어느 집이나 다 같을 겁니다. 함께 긴 세월을 보낸 가족이지만, 그래서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기억의 갈피갈피를 풀어내면 서로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세월을 살았는지 깜짝 놀라게 됩니다.

무릇 대화라는 게 다 그렇지만, 특히나 삼대가 대화하려면 그 모른다는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첫 만남의 설렘을 품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거지요. 판단하고 채근하기 전에, 단정 짓고 짐작하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 형님 아우, 사위 며느리, 손녀 손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맘으로 살고 있는지 가만히 들어주는 겁니다. 결론을 내겠다는 마음은 버리고, 오로지 모른다는 마음 한 가지만 갖고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도란도란 꿈같은 시간이 흐르지 않을까요.







필자소개



김이경


"취미로 시작한 책읽기가 직업이 되어 출판사 편집주간으로 일했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책을 읽고 쓰고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립도서관에서 독서회를 11년째 지도 중이며,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인사동 가는 길]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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