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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끄럽습니다,
  • 뉴스관리자
  • 등록 2009-01-24 19:5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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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장거리 여행 중에 읽은 한 권의 책이 심한 자책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자는 가정환경이 어려워 유랑 걸식을 하였으며, 독신으로 평생 한촌의 작은 교회 종지기를 천직처럼 여기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교회 옆에 붙은 작은 토담 방 한 칸에서 쥐들과 함께 자면서도 동화작가로서 주옥같은 동화와 산문을 남겼고, 책이 팔려 인세로 들어온 상당한 금액을 모두 북쪽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보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나신 분입니다.

청년시절 가난과 배고픔으로 얻은 병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평생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보신 분입니다. 그런 분의 눈에 비친 농촌의 황폐한 실상이나 스러져 가는 전통 문화, 파괴되어 가는 자연 환경에 대하여 쓴 책을 마지막까지 읽은 후엔 처음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읽으려 했던 자신의 경망함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외국산 수입자재로 지어졌다는 호화판 빌라가 수 십 억 원씩 불티나게 팔리고, 땀 흘리지 않고, 손에 때 묻히지 않고, 흙가루, 시멘트가루, 기름 찌꺼기, 비린내 묻히지 않고, 미싱 바늘에 찔려보지 않고, 톱니바퀴에 손 다치지 않고, 등에 시멘트부대 메어보지 않고, 지게 져보지 않고, 콩나물 값은 깎으면서 고가의 수입품은 사들이느라 돈을 물쓰듯 하는, 이런 삶이 부끄럽지 않은가?"(동화작가 권정생의 산문)

그 분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삶을 재조명해 보게 됐습니다. 그러자 내가 그 분과 대면하고 있다면 아마 쥐구멍으로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정도로 수많은 창피한 일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수 십 년 전, 먹을 것이 없어 보릿고개를 거칠 때는 굶주리다 못해 소나무껍질을 벗겨 먹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밥이 하늘이라는 시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헤아릴 수 없는 밥알과 쌀알을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늘을 버린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동안 너무 맛있는 음식에 탐닉했습니다. 여기저기 맛있다는 식당을 찾아 다니며 미식가를 자처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겸허하지 못하게 맛이 없는 음식은 아예 먹지 않는 방자함을 저질렀습니다.

*손이 크다는 미명 아래 많은 음식을 덥석덥석 만드는 버릇은 또 어떻습니까? 물론 나누어 먹기 위해서도 만들었지만 그래도 먹다 못해 버린 것은 없지 않은지요?

*사다 놓은 야채들을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해먹지 못하고 잊어버려 냉장고에서 썩은 채 발견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두운 것을 싫어하여 여기 저기 불을 켜 쓸데없이 전기를 낭비하거나 무섭다는 핑계로 불을 켜고 자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선 더운물 속에 들어 있다 나와야만 하니, 그 어쩔 수 없는 핑계로 하루 두 번 가득 채운 욕탕의 물을 버리고, 부엌의 수도 꼭지는 펑펑 틀어 놓고 썼으니 귀한 수자원 시대에 저지르고 있는 큰 낭비입니다.

*뒷면은 멀쩡한 종이를 앞면만 쓴 후 그냥 버리고, 잡다한 문구류등은 다 쓰지도 않고 버린 경우도 많습니다. 자주 읽지 않는데도 전공 책이랍시고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수 십년 끌고 다닌 책들로 채운 책장들도 공간 낭비입니다.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살림살이를 조금 낡았거나 구식이라는 핑계로 버렸습니다. 자주 쓰지도 않는 그릇들을 예쁘기만 하면 사는 버릇과 그걸 혼자 만끽하던 사치하고 허영심 많은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직업 탓이라고 자위하고 살아 왔지만 이제는 그 직업을 떠났음에도 아직 많은 옷이 옷장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 정리하고 남을 주기도 했지만, 아직도 미련이 남아 보관하고 있는 20년 묵은 옷, 자주 입지 않는 옷까지 짐처럼 껴안고 있습니다.

*꽃을 좋아하여 꽃 사기 꽃 심기에 지출한 낭비는 얼마였는지, 어려운 이들은 몸을 의탁할 방이 없고 목숨을 부지할 기본 식량도 없어 굶어 죽어 가는데 나는 장미꽃에 파묻혀 희희낙락하며 꽃과 나무에 탐닉해 있었던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이 중 가장 부끄러웠던 점은 자식들에게 돈 관리하는 방법이나 절약하는 정신을 심어 주지 못한 것입니다. 엄마의 화려한 직업을 보며 성장한 아이들에게 작업장에서 막노동꾼처럼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 줄 기회가 드물었습니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화려한 겉모양이 허영심만 심어준 것 같습니다.

*하루를 연명하기 힘든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많지 않은 물건이라도 그것이 모두 내 소유라고 생각하고 있지나 않는지, 그것이 부끄러운 것임을 아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몇 년 전부터 마음 먹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으나 반만큼도 실천하지 못한 것들을 올해부터는 강도를 높여 향후 5년 안으로 끝맺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주기, 불필요한 것에서 떠나기,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헤아려 보니 방 한 칸, 목욕탕 하나, 작은 부엌 하나, 옷장 하나이며 조금 사치스럽게 미련을 갖자면 작은 공부방이 하나 더 있으면 합니다. 많은 것에 애착을 버리고, 남아 있는 물질적 욕망의 끈을 어서 빨리 놓기 위한 연습을 매일 할 것임을 스스로에게 약속합니다.

오직 내 몫은 한 그릇의 물인데 내가 두 그릇의 물을 차지하고 있다면, 내 몫은 한 그릇의 밥인데 내가 두 그릇을 먹고 있다면 또한 그건 남의 몫을 빼앗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돌아가신 그 동화작가는 서슬 푸르게 말씀 하셨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모두가 공생하기 위해선 다시 한 번 살아온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깊이 반성하고 정신적 재무장을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깊이 깨우쳤습니다.








필자소개



오마리


글쓴이 오마리님은 샌프란시스코대학에서 불어, F.I.D.M (Fashion Institute of Design & Merchandising)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후 미국에서 The Fashion Works Inc, 국내에서 디자인 스투디오를 경영하는 등 오랫동안 관련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 그림그리기를 즐겼으며, 현재는 캐나다에 거주하면서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많은 곳을 여행하며 특히 구름 찍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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