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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지저분한 이야기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9-16 09:5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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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누나 혼자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런 낙서 기억 나십니까? 그때 친구의 누나는 왜 하필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 낙서는 누나의 상당한 저항과 이유 있는 신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다짐으로 이어집니다. 화장실 낙서의 ‘고전’입니다. 이 경우에는 화장실보다 WC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1960년대 식 은어로는 ‘나홀로 다방’입니다.

개인들의 독자적 공간이 부족했던 시대에 화장실은 단순히 신체적 배설만 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화장실 낙서가 줄어든 것은 그런 곳이 아니라도 정신적 배설을 할 독자적 공간이 충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중도덕이 향상된 데다 화장실 내부의 재질이 낙서를 하기 어려워진 점도 있습니다. 회사 인근 빌딩의 화장실에 앉아 문에 붙여진 안내문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안내문은 “용변을 다 보신 후에는 꼭 물을 내리시고 변좌 주변에 ○이 묻어 있으면 휴지로 닦아 다음 이용자가 기분 좋게 이용하도록 해 주세요. 당신의 양심을 믿습니다”라고 돼 있었습니다. 양심까지 거론한 이 글에서 말을 하나 숨기고 ○가 뭐냐고 퀴즈를 내면 사람들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며 혼자 낄낄거렸습니다. ○는 ‘물’입니다. 그걸 ‘똥’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한 달쯤 전입니다. 지하철역에 서 있는데 갑자기 뭐가 나왔습니다. 전 날 과음한 탓인지 아침부터 배가 살살 아프긴 했지만, 대체 이게 무슨 낭패입니까? 괄약근을 잔뜩 조이고 두 정거장 지나서 내려 비지땀을 흘리며 옹기족 옹기족, 그러나 최대한 빠르게 회사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참 재수도 없지. 아는 사람과 딱 마주쳤습니다. 그는 오랜만이라며 반갑다고 내 손을 오래 흔들었는데, 반갑기는커녕 나는 거의 죽여 버리고 싶었습니다. 겨우 그와 헤어진 뒤 24시점에서 일금 6,000원에 팬티 한 장 사 들고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정말 악몽같은 아침이었습니다.

그 날 변기에 걸터앉아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의 대하 역사소설 <대망>을 생각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뒤, 그의 심복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동군에 패해 도주하다가 생쌀을 먹고 배탈이 납니다. 그는 “이에야스를 상대로 대격전을 벌인 서군의 총수가 여기저기 엉덩이를 까고 설사나 하고 다니다니…” 하고 자조합니다.

견줄 자 없는 불세출의 영웅도, 만고절세의 경국지색도, 가슴에 우주를 품은 천하의 대문장도 이 문제에는 대책이 없습니다.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도 설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매화를 지극히 사랑했던 퇴계는 이질에 걸려 타계하기 5일 전 설사를 하자 “梅兄(매형)에게 미안하다”며 화분을 옮기도록 했습니다. 후학들의 기록에 의하면 퇴계의 밥상에 오른 것은 가지 무 미역 세 가지뿐이었고, 뒷간에는 반드시 새벽이나 저녁, 음식을 입에 대기 전에 갔다고 합니다. 먹고 나서 싸는 것과 정 반대인 셈인데, 성현군자들의 똥 누는 이야기만 모아서 써도 재미있는 책이 될 것입니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예수님도 똥 누나요?”라는 질문이 올라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쌉니다! 먹으면 싼다는 것은 성경보다 더 확실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라고 일러 준 사람은 마태복음 9:10, 25:37, 누가복음 24:30, 24:42 등 예수가 먹고 마신 성경 기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험해서 똥이 썩지 않고 화석이 되어 어딘가 묻혀 있을 텐데 그걸 찾아내면 떼돈 벌기는 시간문제”라는 답변도 눈에 띕니다.

대학교 1학년 땐가 읽었던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李秉岐ㆍ1891~1968)의 타계 이태 전 일기에는 대변을 본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아니, 이게 대체 뭐야? 천하의 가람이 삶의 원숙한 성찰을 담아도 시원찮을 일기에 겨우 똥 누는 이야기나 써 놓다니! 정말 실망이었습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에 그 일기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유홍준은 “당시 가람에게는 똥 누는 것이 일상사가 아니라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면서 눈물겹고 처연하기 그지없는 일기라고 말했습니다.

나이 들어 가람의 일기를 읽었다면 내 느낌도 달랐겠지만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의 중요함을 젊어서는 잘 모릅니다. 윤동주의 시 <병원>에는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과 정반대로 젊은이는 노인의 몸과 삶에 대해 무지합니다. 똥에 대한 생각도 나이와 더불어 원숙해지고 너그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똥이 문화 연구와 예술 창작의 소재가 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부터입니다. 더럽고 냄새 나고 피해야 하는 것으로만 인식했던 똥을 새롭게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원역사가이며 설계자인 캐롤라인 홈스는 <똥>이라는 저서에서 똥을 가리켜 ‘완벽하게 설계된 꾸러미, 삼라만상을 비옥하게 만드는 창조물, 창조적인 배양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200여년 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열하일기>에 “청나라 문명의 핵심은 기와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고 말한 것은 정말 놀라운 통찰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조주선사(趙州禪師)는 급하고 절박한 것이란 무엇이냐는 운수납자(雲水衲子)의 질문에 “오줌 누고 똥 누는 게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이 노승이 스스로 누어야 한다는 것이네”라고 답했습니다. 수행하는 자에게 가장 급한 것은 각자 스스로 힘쓰는 일이며 제 똥을 제가 누는 것, 그것이 곧 불교라는 뜻이랍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는 정화의 여신 클로아치나(Cloacina)를 받든 침실 변기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 변기에는 ‘오, 이 집의 여신이신 클로아치나님, 당신의 종을 웃는 얼굴로 보아 주소서. 제 봉헌물이 부드럽고 차지게 흐르도록 하시고, 무지막지하게 빠르거나 고집불통으로 느리지 않게 하소서’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추석연휴에 배탈이 난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불자들이 성불(成佛)을 지향하는 자세로 모두 늘 성분(成糞) 잘하셔서 클로아치나 변기에 씌어 있는 것처럼 부드럽고 차지게 쾌변(快便) 방분(放糞)하시기를 바랍니다. 어휴, 냄새야!







필자소개



임철순


한국일보에서 30여년간 근무하는 동안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주필로 일하며 신문에 ‘임철순 칼럼’을 연재한다. 사회현상에 대한 참신한 시각과 함께 감성적인 터치로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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