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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수업
청소년 시절에 읽었던 소설중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 (Alphonse Daudet) 가 쓴 “마지막 수업”을 읽고 뭉클한 감동에 젖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프랑스 북동부와 독일의 라인강 서안 국경지대의 알사스 지방 마을에 사는 프란츠라는 어린 소년의 얘기입니다. 모국어인 프랑스어 공부를 하기 싫어하던 프란츠가, 마을이 프러시아(독일)에 점령당하여 프랑스어 대신 독일어만을 배워야 함으로서 나라말을 상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프랑스어 시간에 땡땡이를 치던 철 없던 프란츠는 아멜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에서 슬픔에 젖게 되며 프랑스어의 상실을 통하여 모국어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많은 수업을 시작합니다. 어머니의 젖을 빠는 수업으로서 최초로 생존의공부를 합니다. 울어야 밥을 주니 울고 칭얼 대는 것을 배우고, 기어다니고 앉고 드디어 걷기 시작하면서 자유의지에 대한 공부를 합니다. 대 소변을 가리기 시작하면서 생리욕구의 처리 방법을 배웁니다. 무수하고 다양한 형태와 색갈로 포장된 많은 레슨 (수업)은 우리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동반 할 수 밖에 없는 필수 과목인 것 같습니다.
정신의학자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퀴블러 (Elizabeth Kubler-Roth) 로스는 수많은 죽음과 상실을 겪은 환자들과의 상담과정을 그의 저서 인생 수업( 한국어 번역판) 미국판 :Life Lessons)이라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그녀의 메세지는 우리에게 사는 동안 가장 의미있는 수업은 실패의 수업, 용서의 수업, 이별과 상실의 수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어디든지 실패가 도사리는 삶이 전개되거나, 용서 해야만 하는 증오와 분노의 일들이 우리의 일상에 산재하며,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야 하는 이별과 상실로 인한 상처를 인정하고 준비함으로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면역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떠나는 날까지 용서, 상실과 실패등의 수업을 거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분노 혹은 저항감을 용이하게 정화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런지 어려운 내용이라고 이글을 읽는 동안 내내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상실로 인해 받는 고통의 질량과 색갈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떤이는 쉽게 견디고 승화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이는 정신과 병원으로 원하지 않는 평생 여행을 떠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후자에 더 가까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상실감을 견디고 버티기에는 너무 신경이 섬세하고 가늘며, 쉽게 감성에 무너지는 약점으로 타인들은 잘 헤쳐 나가는 일에 서투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가진 상실감의 무게가 타인의 것보다 크다고 생각하듯이 내가 겪은 상실감이 크다고만 생각한적이 많은 이유가 아닐가 합니다.
최초로 받은 상실의 기억은 어느 추운 겨울날 갑자기 떠나가신 아버지의 초상날로 시작됩니다. 겨우 소녀로의 발을 딛던 나이, 항상 가까이에서 글과 서도등을 가르쳐 주시며 정신적 문학적 영향을 크게 주셨던, 그리고 형제중 가장 사랑을 많이 해주셨던 아버지를 잃은 기억입니다. 아버지의 창백하고 차디찬 얼굴의 느낌, 입관식에 관을 붙들고 같이 죽겠다고 울었던 13세 소녀의 그 최초의 상실은, 초로의 나이 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원초적인 와로움과 상처로, 부성적인 사랑을 그리워 하는 가슴 시린 깊은 병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절감했던 상실의 기억이 또 있습니다. 그해 남편의 공부가 끝나가고,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기다리고 기다렸던 딸을 낳아 마냥 희망에 부풀었던 어느날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고생도 딸을 낳으므로서 모두 상쇄 될 만큼, 단 한번 풍요롭고 행복했던 시간들이 공포와 처절로 도륙되버려 눈물조차 흘릴 수 없던 그 날 아침, 내 목숨이었던 딸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비통했던 사건은 나로 하여금 알코홀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고 심한 우울증 증세는 간헐적으로 몰려와 아직도 힘겹게 치루어야 하는 전쟁입니다.
그녀를 잃은 상실은 어떤 무게의 상실감으로도 표현 될 수 없는 어둠의 강, 흘러도 흘러도 끝이 없는 상처의 강, 출렁이는 그 죽음의 강을 빠져 나오기 위해 싸워 온 수십년이었습니다. 살아야만 한다고 외치며, 이 멍에의 끈을 잘라야 해, 나는 열심히 살았어 그러니 행복해야해, 그런 자격도 있어, 그녀가 살아 있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거야, 행복했겠지 라는 바보같은 미련도 버려야 해, 그러니까 웃어야지, 아침에 일어나 거울 앞에 스면 웃음 잃은 얼굴, 시도 때도 없이 덤벼드는 악마 같은 우울증에 허우적 대는 나의 얼굴, 그것을 고치려 의식적으로 웃는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남들은 상실의 치유를 쉽게도 하건만 나는 어떤 감성의 소유자여서 이렇게 제대로 수습을 못하는 것인가, 나의 감성을 버리고 싶고 미워도 합니다. 왜 나만 이런 것인가? 아니면 남도 이런 것인가? 상실의 수업을 거치면 성숙해진다는데 나는 아직도 철부지 같은 생각 속에 빠져 사는가. 생각해보니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이 상실의 수업을 통해서 나는 고통과 아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이해와 사랑이 생겼음을 믿습니다. 그냥 말로 쉽게 위로해 주는 가벼움이 아니고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또한 내 슬픔의 원천인 나의 상실감은 내가 지고갈 나의 몫이란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 수업의 저자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유형, 무형의 것들이 언젠가는 결국 사라지거나 퇴색해 가는 것이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주인이었던 적도 없으며 잠시 빌려온 것에 불과 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은 삶이 곧 상실이고 상실이 곧 삶이란 는 것을 모른 채 평생 상실과 싸우고 그것을 거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므르서, 우리는 단 한번의 즐거운 놀이를 위해 이 곳에 온 별의 순례자로 너무 삶을 심각하게 살지 말라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찬란한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조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고 싶은 것을 지금 하라고 말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고 싶은 일, 누구나 절절히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하여 누군가에게 상실로 인한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나 아닌 누군가가 또 다른 상실감에 아퍼해야 한다는 것은 바르게 생의 마감을 준비하는 것이 아닌듯 합니다. 우리는 생의 마지막 순간 까지도 나의 상실감은 스스로 지고 가야 하는 내 몫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순리가 아닐까요.
필자소개
오마리
글쓴이 오마리님은 샌프란시스코대학에서 불어, F.I.D.M (Fashion Institute of Design & Merchandising)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후 미국에서 The Fashion Works Inc, 국내에서 디자인 스투디오를 경영하는 등 오랫동안 관련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 그림그리기를 즐겼으며, 현재는 캐나다에 거주하면서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많은 곳을 여행하며 특히 구름 찍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