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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세의 인생 공부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8-25 09: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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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 선들바람에 가슴속까지 시원합니다. 어느덧 가을의 문턱입니다. 창문을 열면 매미의 합창이 싱그럽습니다. 여기저기 나뭇가지에서 경쟁하듯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마치 큰 회오리처럼 골목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저들에겐 지금이 생의 절정기입니다. 날씨가 더 서늘해지기 전 종족 번식이라는 생의 마지막 과업을 완수하고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산행에서 친구와 다투던 매미의 일생을 확인해 보느라 백과사전을 뒤져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참매미나 유지매미는 알에서 부화되면 곧바로 땅속으로 들어가 6년 동안 나무뿌리의 수액을 빨아 먹으며 굼벵이로 산다고 합니다. 이 매미 유충이 땅속에서 성장을 거듭하다가 7년째 늦은 저녁 나무 위로 기어 올라와 마지막 허물을 벗고 매미 성충이 되는 것입니다. 천적들의 눈을 피해 어두운 밤 나무 위에서 등껍데기를 터뜨려 화사한 날개를 뽑아 펴는 우화(羽化)는 매미에겐 화려한 성인식인 셈입니다.

그렇게 성충이 된 매미는 짧으면 한 주일, 길어야 겨우 한 달 정도를 밝은 세상에서 살며 2세를 위한 합창과 교미를 반복하다가 목숨을 거두고 맙니다. 울음소리가 우렁찰수록 더 많이 교미를 할 수 있고 그만큼 부여된 임무의 충실도를 높이는 것이 됩니다.

놀랍게도 북아메리카에서 사는 매미 일종은 17년간이나 유충으로 땅속에서 산다고 합니다. 한 해만 지나도 어미가 되어 새끼를 낳고 10년이나 20년 넘게 사는 개, 고양이에 비하면 매미 생애의 준비는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대략 20세를 전후로 성인에 이르게 됩니다. 이후 60세를 넘겨 평균적으로 70, 80세를 살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을 언감생심 천하 미물인 매미에 비교한다는 게 외람되지만 어쨌든 그 효율성에서 참으로 축복받은 삶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생활환경이 좋아지고 수명이 길어진다고 무작정 즐거워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생살이가 그렇게 잘 설계되어 있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장수가 고통이 되고 노후가 불안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수명이 길어지는 만큼 경제활동 기간도 길어져야 할 텐데 오히려 현실 사회에서는 세대교체의 주기가 더욱 짧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개인으로서는 20, 30년을 벌어 30, 40년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사회로 보면 30, 40대의 청장년들이 나머지 전 세대를 부양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흔히들 ‘떠날 때를 아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다우니 어쩌니’ 박수로 은퇴를 축하합니다. 그러나 막상 호기롭게 직장을 떠난 은퇴자들의 대부분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처치 곤란한 짐이요 천덕꾸러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모임에 나온 친구가 자기소개를 이렇게 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화백(화려한 백수)’이었는데 요즘은 ‘마포불백(마누라도 포기한 백수)’이 되었노라”고.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지만 뒷맛은 씁쓸했습니다.

대부분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해온 지금의 은퇴자들에겐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 따위는 전혀 투자종목에 들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다가온 질병에 덜미 잡혀 육체적 고통은 물론 가족들 눈치를 보며 정신적 고통까지 겪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평소 취미생활이나 친교활동을 갖지 못했던 이들은 궁핍이나 질병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고독이라는 중병에 절망하게 됩니다.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질병으로부터의 해방, 고독으로부터의 탈출은 이제 인생 후반기의 절대적인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자식 농사 잘 지었다고 느긋해 하던 사람일수록 문제가 더욱 심각합니다. 캥거루족은 늘어나도 부모를 공양하는 풍속은 자취를 감추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지는 못해도 덜 불행한 인생 후반기를 위해 가족들의 관심과 국가적인 배려가 필요하다고들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 스스로의 준비자세일 것입니다. 어느 95세 노인의 일기가 요즘 인터넷 블로그에 떠다니며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 나이에? 어쩌면 각색일지도 몰라, 하면서도 마음을 붙잡는 그 글귀를 거듭 음미하게 됩니다.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덕에 65세 때 당당히 은퇴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 95번째 생일에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내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나는 퇴직 후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그냥 덤이다’라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없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덧없고 희망이 없는 삶... 그런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습니다.

30년은 지금 내 나이 95세로 보면 3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시간입니다. 만일 내가 퇴직할 때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난 정말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나 스스로가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95세지만 정신이 또렷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지 모릅니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날, 95세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체육부장, 부국장, 경영기획실장과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여러 차례의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등 세계적인 스포츠대회의 현장을 취재했고, 국제스포츠이벤트의 조직과 운영에도 참여하며 스포츠경기는 물론 스포츠마케팅과 미디어의 관계, 체육과 청소년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된 글들을 집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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