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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보다 건강하시네요”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7-05 11: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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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보다 건강하시네요”



두 달 뒤에 만 아흔이 되는 누님이 계십니다. 허리에 통증이 좀 있어 보행이 약간 어렵지만 식욕 청력 기억력 등 거의 모든 신체 기능이 정상에 가까워, 서울 근교로 이사 가기 전인 작년 말까지는 가끔 우리 집에도 놀러 와 자정 넘게까지 고스톱을 즐길 정도였습니다. 환갑에 가까운 며느리가 오히려 잔병치레를 많이 해 “어머님은 저보다 오래 사실 겁니다”라고 말했다가 “그런 욕된 소리 하지 마라”고 꾸지람을 듣기도 합니다.

이 누님은 이미 고손자도 둘이나 봐 더 이상 이승에서 바랄 것은 없다고 하시며, 언제나 잠자듯이 편안하게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십니다. 남편 제사 때면 으레 “영감, 나 좀 빨리 데려가세요”하고 빌기도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나 아들 내외는 듣기 싫다고 하지만 당신은 거의 진심으로 그렇게 바라고 있는 것같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가끔 찾아가는 우리에게 “어머님은 저보다 더 건강하세요”라고 전하는 며느리를 몹시 미워하십니다. 교양 있는 사람답게 며느리와는 표면상 퍽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히려 며느리의 건강을 염려해 집안일도 많이 돕고 며느리에 대한 불평을 밖으로 표시하는 일이 드문, 이상적인 고부관계로 저에게는 보입니다.

그런 분이지만 당신이 건강하다고 며느리가 하는 말은 약간 삐딱하게 받아들이게 되는지 그리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건강하셔서 다행입니다”라고 할 때도 “얘, 그런 소리 마라”하며 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아흔 넘게 건강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사촌 누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도 건강하다는 인사말을 하면 “동생, 그런 말 말게. 아이들을 위해서도 빨리 가야지”라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 누님의 세 아들은 효성이 지극해 동네 칭찬이 자자했고, 매일 경로당에 가시기 전 용돈이 넉넉한지 며느리가 꼭 챙겨 드리곤 했습니다. 두드러진 노인성 질환이 없이 다복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그 누님은 만날 때마다 그런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80대 중반에 접어든 저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나 외국 친구들로부터 나이보다 훨씬 건강하게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은데, 이것 역시 좀 더 살고 봐야 알게 되는 노인심리의 기미(機微)인지 모르겠습니다. 설 늙은이라는 말은 아직 듣고 싶지 않습니다.

최근 5일 동안 묵고 온 일본 친구의 집에 92세 되는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제가 지금껏 만난 90대 노인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늙으신 분으로, 걷는 자세가 꼿꼿하고 얼굴은 70대처럼 젊어 보였습니다. 귀가 약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고 들었지만 회화엔 전혀 불편이 없었습니다. 지방공무원이었던 남편과 20여 년 전에 사별한 후, 넉넉히 연금을 받으며 한 주일에 한 번 정도는 친구들과 온천여행도 하고 그림 그리기 등 취미활동에도 열심이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넓은 정원의 여러 가지 수목과 잔디에 물을 주는 것이 이 할머니의 첫 일과입니다. 또 근처에 사는 두 손녀의 아이 넷이 낮에는 이 넓은 집에 와 있는데, 맞벌이하는 부모가 직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며느리와 함께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분도 우리 누님처럼 “건강하십니다”라는 인사를 받는 것을 싫어한다고 며느리 되는 이 집 아주머니가 귀띔해 주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추측한 누님의 심리상태와 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이 며느리는 초등학교 교장 직에서 정년 퇴직한 분입니다. 일본 노인복지정책에 관심이 많은 제가 부탁해 찾아가게 된 유료 복지요양원에 남편과 동행하여 안내해 주었습니다. 자기네들도 관심이 많다고 실토한 뒤 실은 집 부근에 지금 건설 중인 시설이 두 개나 있어 광고물도 많이 받았지만 시어머니 면전에서는 이야기도 제대로 꺼내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70대처럼 건강한 시어머니에겐 말도 붙이지 못했지만, 우리가 방문한 요양원에 대해서는 저 이상으로 관심이 많아 안내를 맡은 직원에게 질문도 많이 했습니다. 정부 보조금 한 푼 받지 않고 순 민간자본으로 경영하는 그 요양원은 금년 초 개원했는데, 노인 62명이 직원 30여 명에 부러울 정도의 초현대시설과 좋은 환경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퍽 행복해 보였습니다.

마침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20여 명의 노인이 <겨울 연가>의 DVD를 대형 스크린으로 감상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중 두 분은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총무이사의 설명에 의하면 세 팀으로 나누어 매일같이 이런 오락프로 시간도 가진다고 했습니다.

진부한 질문 중에 “건강과 돈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면...”하는 게 있습니다만, 저는 “나이답지 않게 건강하다”는 핀잔 비슷한 말을 들어도 좋으니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하게 살다 가는 길을 택하고 싶습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 TIME 서울지국 기자
-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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