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신앙과 세계화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4-21 08:41:59

기사수정
 
1997년부터 10년간 영국의 총리를 지낸 토니 블레어가 이달 초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신앙과 세계화”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블레어는 원래 성공회 (영국 국교회라고도 함) 신자였으나 작년 크리스마스 직전 가톨릭이 되었고 이번 연설은 가톨릭 신자로서 처음 행한 연설이라고 합니다.

블레어는 올 여름 런던에 ‘토니 블레어 신앙 재단’을 세우고 그 재단을 통해 종교간 대화를 촉진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겠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 무슬림, 유태인, 불교도, 시크교도 등, 다른 종교의 신도들이 합심하여 각국 정부로 하여금 ‘새천년 발전 목표 (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이루게 하고,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살고 있는 세계 극빈자들의 수를 2015년까지 절반으로 줄이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연설을 잘하기로 소문난 블레어는 작년에 중국에서 한 연설로 24만 파운드, 올해 초 미국 플로리다의 골드만 삭스 회사에서의 연설로 30만 파운드를 벌었지만, 웨스트민스터에서 한 연설에 대해서는 금전적 대가를 전혀 받지 않아 신앙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블레어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민다나오 섬에서 활동 중인 자선 단체 제이티에스 (Join Together Society)가 떠오릅니다. 열흘 전 한겨레신문 기사를 보기 전까진 민다나오가 분쟁지역인줄도, 제이티에스라는 단체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한때 원주민들의 낙원이었던 민다나오는 14세기엔 무슬림들이, 16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절과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미국 식민지 시대엔 기독교인들이 정착하면서 분쟁에 시달려 왔다고 합니다. 게다가 필리핀 전역에서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공산주의자 반군들로 인한 상처와 피해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한국의 제이티에스가 들어간 것은 2002년, 이사장인 법륜스님이 북한동포돕기와 남북화해협력에 대한 공로로 막사이사이상 국제평화와 이해 부분에 선정되면서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만난 민다나오의 토니 대주교로부터 “남북의 갈등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처럼, 종교와 민족문제로 갈등하는 필리핀 민다나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는 말을 듣고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아(飢餓), 질병, 문맹이 없는 세상을 목표로 하는 제이티에스는 여러 차례의 지역 답사 후에 장애인 특수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 지원 사업을 진행하여 지금까지 29개 마을에 64칸의 교실을 지었답니다. 그동안 민다나오를 찾아온 다른 단체들이 주로 포교에 열심이었던 반면 제이티에스는 종교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이티에스의 웹사이트(www.jts.or.kr)에도 불교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이사장이 스님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 단체와 불교의 관계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웹사이트의 맨 아래쪽 귀퉁이에 있는 “패밀리 사이트”라는 곳에 들어가야만 ‘정토회’와 ‘에코붓다’ 같은 불교식 명칭을 볼 수 있습니다.

법륜 스님은 1991년 인도의 불교성지를 순례하던 중, 캘커타 거리에서 아이의 우유 값을 구걸하는 젊은 여인과 둥게스와리 마을 200여 명의 아이들이 모두 길에 늘어서서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돕기 위해 제이티에스 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서울에 제이티에스 인터내셔널 본부가 있고, 미국, 인도, 필리핀, 아프가니스탄에도 제이티에스가 조직되어 있으며, 미국 제이티에스는 북한 라진-선봉 지역의 지원을 위해 라선 상주대표 사무소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법륜 스님의 구호 활동은 처음부터 종교간 협력의 기반 위에 출발했습니다. 스님에게 막사이사이상을 가져다준 북한동포돕기는 천주교, 기독교, 불교를 아우르는 100만인 서명운동 덕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정파적인 이해나 이념적 견해에 우선한다는 믿음으로 사회 전반의 고통 해결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해왔습니다.

토니 블레어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존경하며 행복하게 공존할 때 세계 국가들의 평화 공존도 가능하다고 결론짓고, 종교는 세계화의 비인간적 영향을 인간적으로 바꾸어 인류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 종교는 “선(善)을 위한 적극적인 힘”이라는 걸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하는 것이 블레어 재단의 궁극적 목표라고 합니다. 그는 올 하반기 예일 대학교에서 “신앙과 세계화”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여러 차례 열고 국제 관계 증진을 위한 종교의 역할을 모색합니다.

블레어가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연설하는 동안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연설을 방해하기 위해 악기, 휘파람, 냄비, 자명종 등을 동원하여 온갖 소음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2003년 영국을 이라크 전쟁으로 이끈 장본인이 무슨 종교간 대화 운운 하느냐는 것이지요. 이라크에 억류되었다 풀려난 기독교 평화운동가 노만 켐버는 블레어가 너무도 비기독교적으로 처신했다고 비난하며, 성당에서 연설을 할 게 아니라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비꼬았습니다.

지나간 일은 신도 바꿀 수 없으니, 어쩌면 블레어가 종교간 대화를 부르짖는 건 이라크전쟁에 참여한 걸 후회하는 속내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부디 블레어의 새로운 노력이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과 세계화”를 아름답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1953년 동갑내기 법륜 스님의 행적에서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필자소개



김흥숙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기자,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코리아타임스에 "Random Walk"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중이며, 한겨레 신문에도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김 태길의 "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 을 영역한 것을 비롯, 1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회원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서울 27일, 부산 23일째 '역대 최장 열대야'…곳곳 밤더위 기승 서울 27일, 부산 23일째 '역대 최장 열대야'…곳곳 밤더위 기승제주는 33일 연속 열대야, 인천도 최장기록 경신 앞둬(전국종합=연합뉴스)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밤이 돼도 더위가 가시지 않으면서 전국 곳곳에서 역대 가장 긴 열대야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17일 기상청에 따르면 전날 저녁부터 이날 아침 사이 지점별 최저기온은 서울 ...
  2. 尹 "삐약이 신유빈 팬 됐다…민생·안보 대통령 금메달 따고파" 尹 "삐약이 신유빈 팬 됐다…민생·안보 대통령 금메달 따고파"파리올림픽 기념행사 깜짝 참석…"국민에 용기와 자신감" 선수단 격려"밤잠 못 자고 경기 챙겨봐…여름날 시원한 선물 준 선수들에 감사"(서울=연합뉴스) 곽민서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2024 파리 올림픽 기념 행사에 참석해 선수단을 격려했다고 대통령실 정...
  3. 논산소방서, 을지연습·민방위 훈련 연계한 '전국 동시 소방차 길터주기 훈련' 실시 논산소방서, 을지연습·민방위 훈련 연계한 '전국 동시 소방차 길터주기 훈련' 실시 논산소방서(서장 김경철)는 오는 22일 오후 2시부터 을지연습·민방위 훈련과 연계해 전국 동시 ‘소방차 길 터주기’ 훈련을 실시한다고 밝혔다.이번 훈련은 민방위 날과 연계해 전국 소방서에서 동시에 진행하며, 긴급차량의 신속한 ..
  4. 물놀이장 찾은 북한 수해지역 어린이들 물놀이장 찾은 북한 수해지역 어린이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 수해지역 어린이들이 지난 16일 평양 문수물놀이장과 릉라물놀이장에서 즐거운 휴식의 한때를 보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7일 보도했다. 2024.8.17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nkphoto@yna.co.kr(끝)
  5. 해상생환훈련 시범 보이는 공군 교관 해상생환훈련 시범 보이는 공군 교관 (서울=연합뉴스) 공군이 지난 14일 경남 해상생환훈련장에서 조종사 해상생환훈련을 실시했다고 17일 밝혔다. 사진은 공군 교관이 취재진에게 낙하산 견인 훈련 시범을 보이는 모습. 2024.8.17 [공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끝)
  6. '지방소멸 대응' 공주시 임신부 건강관리비 지원·주 4일 출근 '지방소멸 대응' 공주시 임신부 건강관리비 지원·주 4일 출근(공주=연합뉴스) 박주영 기자 = 충남 공주시와 공주시의회가 저출생과 지방소멸 위기 대응을 위해 임신부 지원 조례를 제정하는 등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 조성에 나섰다.17일 시의회에 따르면 국민의힘 권경운 의원은 최근 '공주시 출산 지원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 ..
  7. [전국 주요 신문 톱뉴스](19일 조간) [전국 주요 신문 톱뉴스](19일 조간) ▲ 경향신문 = 경찰은 막고, 법원은 조건 달고 윤 정부서 '집회 제한' 늘었다 ▲ 국민일보 = 李 85% 압승… "영수회담 하자" ▲ 매일일보 = 고금리에 빚더미 산업계 줄도산 '비상' ▲ 서울신문 = 두 손 번쩍 ▲ 세계일보 = '일극' 굳힌 이재명 "국정소통 영수회담 하자" ▲ 아시아투데이 = 내.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