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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을 바라보며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4-07 09:5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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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을 바라보며



도시마다 내세우는 상징물이 있습니다. 파리의 에펠탑, 런던의 빅벤, 로마의 콜로세움,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모스크바의 크렘린(러시아어로는 Московский Кремль 모스콥스키 크레믈리: 성채라는 뜻이라고 합니다만) 혹은 바실리성당, 베이징의 천안문,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도 남대문이라는 상징물이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처음 서울 올라와 역 광장에서 올려다 본 남대문은 장관이었습니다. 듬직한 석축 몸통 한 가운데 멋진 홍예문과 그 위에 올라앉은 누각이 우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연중 눈 내리는 것 한 번 보기 어려운 남해안서 자란 어린 눈에는 까만 지붕 위에 덮인 새하얀 눈도 너무나 환상적이었습니다.

남대문은 사실 정신나간 한 사람의 방화에 의해 허물어진 게 아닙니다. 전후좌우로 아무 통제 없이 다닥다닥 붙여 올린 멋대가리 없는 사각 고층빌딩들로 인해 남대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팽개쳐진 헛간처럼 자존심을 잃어버린 터였습니다. 으레 모든 걸 잃고 나서야 자신의 무심함을 탓하곤 하는 게 우리네 사정입니다.

서울서 한 시간 거리, 수원에는 화성이 있습니다. 네모반듯하게 깎은 돌과 벽돌로 이어붙인 성벽, 크지도 작지도 않고 알맞게 올라앉은 문루… 볼일 때문에 수원 시가를 지나다니다 마주치는 화성의 맵시에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성 둘레가 겨우 5.7km 남짓. 그리 큰 규모는 아닙니다. 그래도 장안문(長安文) 팔달문(八達門) 창룡문(蒼龍門) 화서문(華西門)의 4대문이 번듯하고 수로 위를 홍예로 장식한 화홍문(華虹門)과 암문(暗門)에 장대(將臺: 장군의 지휘소), 노대(弩臺: 활쏘는 곳), 포루(砲樓)와 봉돈(烽墩: 봉수대까지 갖췄으니 그만하면 완벽에 가까운 옹성 구조입니다.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빚어낸 걸작이라고 합니다. 당파싸움에 휘말려 뒤주 속에서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비통함이 절절했겠지요. 그래서 즉위 후 아버지를 장헌세자, 장조로 추존했습니다. 또 능을 양주에서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하고 매년 극진한 효성으로 능행을 했습니다. 오가는 길에는 여러 행궁을 짓고 수원에는 화성을 조성해 개혁군주로서의 위엄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화성의 축성에는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지혜가 모아졌습니다. 전란으로 내부 시설들이 상당 부분 소멸됐으나 성곽만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대부분 옛 모습대로 복원돼 있습니다. 축성계획, 제도, 동원 인력의 인적사항에서 축성재료의 출처와 용도, 예산, 임금의 지불, 공사일지까지 빠짐없이 정리된 기록 덕분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화성은 사도세자의 비극과 정조의 효심, 실학파 대가들의 기술 참여, 축성관련 자료 등 우리의 역사 유적으로는 드물게 매력적인 용기(容器)에 풍성하고도 충실한 컨텐츠를 담고 있는 문화자산인 셈입니다.

수원 화성은 사적 제3호로, 팔달문(제402호)과 화서문(제403호)은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유네스코도 1997년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습니다. 이것저것 따져보아도 그런 가치를 인정받고도 남을 만합니다.

4월의 화성은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들, 빨갛게 물들어가는 꽃잎들에 둘러싸여 더욱 화사해 보입니다. 서울과 수원을 오가는 버스, 수원 시내를 돌아다니는 차량들은 오늘도 아무 생각없이 매연을 뿜어대며 장안문, 팔달문은 스치듯 돌아나갑니다. 보행객들도 4대문이든 누각이든 거리낌없이 지나쳐갑니다.

남대문을 잃고 나서 허전했던 마음이 요즈음 매일 수원 화성을 바라보며 적잖은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아무도 지키지 않는 저 아름다운 유적들이 또 어떤 구실로 어느 무뢰한의 적의에 아무 죄 없이 희생되지나 않을까 덜컥 겁이 나기도 합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체육부장, 부국장, 경영기획실장과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여러 차례의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등 세계적인 스포츠대회의 현장을 취재했고, 국제스포츠이벤트의 조직과 운영에도 참여하며 스포츠경기는 물론 스포츠마케팅과 미디어의 관계, 체육과 청소년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된 글들을 집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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