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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과 《눈먼 자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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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08-02-18 11: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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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과 《눈먼 자들의 도시》



책의 쓸모를 믿으십니까? 저는 믿습니다. 느닷없는 봉변을 당한 맘을 달래주는 것도, 이혼장을 챙기는 손을 붙잡는 것도, 다리미 대신 양복바지의 날을 세우는 것도, 다 책입니다. 저는 ‘독서처방’에서 그런 소소한 쓸모들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꽤 오랜 세월 책이 주는 위로와 격려에 기대 일상을 견뎌왔기에, 언제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은지 제 나름의 경험이 담긴 독서처방전을 쓰려 합니다. 예를 들어 불타버린 숭례문을 견디기 위해선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소개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노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서서히 불그레한 일렁임이 번지기 시작했답니다. 늘 그렇듯, 미미한 시작은 참으로 창대한 끝, 참혹한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육백 년을 의연하던 나무들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자리에서 익숙하되 좀더 추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네 탓이다 네 탓이다, 보기 흉한 드잡이가 벌어지는 아침. 시를 읽습니다.

“막소주 한 되를 사러/ 질척이는 거믄절 고갯길을/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뒤따라 나선 아이가 자꾸/ 집 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립니다/ 나무가/ 나무가 없다고

까치집을 머리에 이고 있다고/ 그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 그늘을 지운다고/ 오늘 아침나절에/ 옆집 늙은이가 덜컥 베어버린/ 집 뒤에 늘 서 있던/ 그 커다란 굴참나무가 보이지 않는다고

향음주례(鄕飮酒禮)하고/ 천천히/ 활시위를 당기다” (이창기,〈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일부)

분노로 팽팽해진 활시위를 놓으려는 순간 뒷덜미가 서늘합니다. 내 활은 지금 누구를 겨누고 있는가, 자문합니다.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 그늘진다고 멀쩡한 나무를 베어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정말 모르고 있었을까요. 다 알면서도 그저 눈 감고 모르는 척,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까요. 낯을 들어 하늘을 우러를 수 없는 날, 고개를 떨구고 책을 펼칩니다. 여든둘의 주제 사라마구가 주름진 손으로 그려낸 《눈먼 자들의 도시》. 서로의 야만에 눈 감은 도시, 낯익은 도시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어느 날 문득 한 남자가 소리칩니다. “눈이 안 보여!” 느닷없는 실명에 남자는 절망하지만 절망은 그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백색 실명이 불길처럼 도시 전체로 번지고, 공포와 불안이 도시를 사로잡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먼다면’이라는,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음직한 상상으로 시작한 소설은 시간이 갈수록 무서운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흔히 사라마구의 소설 세계를 가리켜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하지만, 이 소설에서 환상은 조금치의 환상도 허용치 않는 냉엄한 환상,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지엄한 환상입니다. 그러기에 이 환상을 읽는 것은 창졸간에 검은 상장(喪章)이 되어버린 숭례문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큼 두렵고 끔찍한 일입니다. 허나 지금은 그걸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할 때입니다. 가림막 앞에서 어설픈 호곡을 한다고 죽은 예(禮)가 살아날까요. “눈이 있으면 보라. 볼 수 있으면 관찰하라”고, 사라마구는 제사(題詞)를 빌려 일갈합니다. 허니 다시 책장을 넘길 밖에요.

처음 실명자들을 사로잡았던 충격, 비탄, 반성, 기도, 원망의 순간들이 지나가고 마침내 그들을 붙드는 건 야만입니다. 불신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동병상련의 연대를 이루지 못하며, 결국 가장 야만적인 폭력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착취하고 강간하고 도륙하는 아수라 지옥에서 오직 한 여자, 모두가 눈먼 세상에서 눈멀지 않은 한 사람만이 홀로 그 지옥을 지켜봅니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인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위안이고 희망이지만 그녀에게 ‘볼 수 있음’은 저주요 악몽입니다. 더구나 그녀는 그 악몽을 누구와도, 사랑하는 남편과도 결코 나눌 수 없지요. 눈먼 자들의 절망까지 견뎌야 하는 지독한 절망이 엄습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감당합니다. 사명감이나 죄의식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연민 때문에 말이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 눈멈이 또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을 즈음, 실명처럼 느닷없이 개안이 옵니다. 모두가 눈을 떴을 때 여자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란 거죠.”

눈멈은 사람들에게 자기 안의 야만을, 문명의 허울을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잃었던 시력을 찾았다 해서, 긴 암중모색 끝에 백색의 너울이 걷혔다 해서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을 쓸 때 사라마구는 여든둘이었고, 여든둘은 인간이 잠시의 곤경으로 깨달음을 얻는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는 아니지요. 소설의 마지막, 그는 아직도 우리는 눈이 멀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순이 가까워 소설가로 문명을 날리고 일흔이 훌쩍 넘어 노벨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의 힘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도무지 타협을 모르는, 이 유례없는 리얼리즘은 그렇게 완성됩니다.

눈을 들어 잿더미가 된 숭례문을 봅니다. 숭례문을 복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 서둘러 복원할 테지요. 더 화려하고 더 근사하게 보이도록. 허나 지금 필요한 건 사라마구식의 철저한 비관은 아닐까요? 사람에 대한 예의를 복원하지 않는 한 그 문짝을 복원하는 게 무슨 소용인지, 이 모든 야단법석이 잠시의 실명을 추억하는 호들갑은 아닌지, 우리가 아직도 눈이 멀어서 무너진 숭례문이 보여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며 제 눈을 의심하는 시간을 견디고 그런 뒤에 활시위를 당겨도 좋으리라, 책장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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