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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이 천하를 쟁취한 까닭
  • 발행인 /김용훈
  • 등록 2008-02-09 01: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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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容壎과 함께 하는 역사기행
 
황제[劉邦]가 낙양 南宮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황제가 말했다,
"제후와 여러 장수들은 감히 짐에게 숨기지 말고 모두 그 심정을 말하라,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은 무었이며 項羽[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었인가?

高起[고기]와 王陵[왕릉]이 대답했다,
"페하께서는 사람을 부려 성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아 그것을 백성들에게 주었으니 천하와 이익을 함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공이 있는 자를 해치고 현명한 자를 의심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천하를 잃은 까닭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공은 하나만 일고 둘은 모르는구나,무릇 군막 안에서 전쟁 모략을 꾸미고 천 리 밖의 승리를 결정하는 일에서는 내가 子房보다 못하다,또 국가를 평정하고 백성을 어루만지고 군량미를 공급하며 군량미의 공급로가 끊기지 않게 하는 일에서는 내가 蕭何[소하]만 못하다, 그리고 백만의 백성들을 연합하여 전쟁을 하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을 하면 반드시 탈취하는 일에서는 내가 韓信[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재주가 출중한 인재들인데 내가 그들을 이용할수 있었다,이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쟁취한 까닭이다,항우는 范增[범증]이란 인물이 있었지만 그를 이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나에게 잡히게 된 까닭이다,이말을 들은 여러 신하들이 기뻐하며 탄복하였다, 재상 소하와 황제 유방

소하(蕭何: ?~BC 193)는 패현(沛縣: 지금의 강소성) 출신으로 법령에 정통하여 진시황제 때에 말단 관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동향인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 후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보좌하여 한제국을 건설한 최고 공신으로 임명되었으며, 계속하여 승상, 상국(相國)으로서 구장율(九章律)을 제정하는 등 왕조의 기초에 공헌하였다.

30세 때 유방은 사수(泗水)의 정장(亭長: 역참의 장)이라는 하급 관리로 있었다. 소하는 유방이 무명이었을 때부터 법률상의 편리를 돌봐주었으며, 유방이 정장이 된 이후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도움을 주게 된다.

어느날 중앙에서 감독관이 시찰을 왔을 때 소하는 그를 도와 시원스럽게 일을 처리해주었다. 이때문인지 사천군(泗川郡)의 관리에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때 진시황이 죽고 이세황제 호해(胡亥)는 환관 조고(趙高)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여 모든 실권은 조고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진시황의 가혹한 정치에 시달려온 백성들은 조고의 학정과 전횡을 견디지 못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이다.

대택향(大澤鄕)이라는 곳에서 반진(反秦)의 기치를 들고 군사를 일으킨 진승 등의 군단은 파죽지세로 점점 팽창하여 북으로 향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반진의 거병을 일으키는 자들이 각처에서 속출하게 되었다.

이 물결이 패현에 파급되어 소하는 유방을 도와 패현의 지사를 죽이고 그를 패공(沛公: 패현의 지사)으로 추대하게 된다.

BC 208년 반진(反秦) 연합군의 명목상 맹주였던 초나라 회왕(懷王)의 명을 받고 유방은 2천~3천 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나라 수도 함양 공략에 나섰다.

당시 반진 연합군 중 최대 세력을 떨치고 있던 항우(項羽)의 군단은 북방에서 진나라 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방은 진나라 군대의 반격에 고전하면서도 결국 함양(咸陽)에 육박하여 2년만에 그것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여도 소하의 역할은 그렇게 눈에 띠지 않았다.

유방이 함양에 제일 먼저 입성하였을 때 부하 장병들은 앞을 다투어 전리품을 다투었으나 소하는 금은보화는 아량곳하지 않고서 오직 승상부(丞相府)나 어사부(御史府)에 보관되어 있던 법령 문서를 접수하는데 몰두했다.

유방보다 2개월 뒤에 입성한 항우가 아방궁에 불을 질러 모든 물건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불태웠을때 만약 소하가 아니었더라면 진나라의 모든 법령 문서들은 모조리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소하가 있었기에 그 문서들을 접수하여 유방은 천하의 요새지, 인구의 다과, 각국의 전력, 인민의 고충 등을 손쉽게 파악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하의 업적은 얼마 후에 시작된 항우와의 천하를 건 쟁패전에서도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왕조의 국정을 본 궤도에 올려놓는 데에도 귀중한 역할을 하게되는 것이다.

항우는 함양에 입성한 후 논공행상을 벌였다. 본래 함양을 제일 먼저 공략한 자에게 요충지인 관중(關中)을 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유방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약속을 파기하고 변방인 파촉(巴蜀)과 한중(漢中)을 주었다.

유방은 이에 불만을 품고 일전을 불사할 태세였지만 소하는 냉정히 정세를 판단하여 필사적으로 간하였다. 절대 열세인 현 상황에서는 패할 것이 뻔하니 한중으로 들어가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방은 소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중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 여러 장수들이 잇따라 도망하여 그 수가 수십명에 달하였는데 어떤 자가 유방에게 소하도 도망을 쳤다고 보고하여 유방이 크게 노하는 일이 있었다.

이틀쯤 지난 후에 소하가 다시 돌아왔을 때 유방은 그에게 달아나게 된 경위를 물었다. 소하는 자신이 달아난 것이 아니라 달아나는 장수 한 사람을 설득하여 데려왔다고 했다. 그 장수는 바로 한신(韓信)이다.

그때까지 무명에 불과했던 장수였지만 소하는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고 있었기에 도망가는 한신을 설득하여 유방에게 대장군으로 천거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용병의 귀재라고도 일컬어지는 한신은 지모의 참모장인 장량(張良), 그리고 명재상 소하와 더불어 한(漢)나라 건설의 최대 공로자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게 되는 것이다.

유방은 한중에서 전력을 가다듬고 나서 다시 물자가 풍부한 관중(關中)을 점령한 후 항우와 천하를 다투게 된다. 3년여에 걸친 대격전을 전개한 이 싸움에서 처음에는 유방측에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는 동안에 차츰 유방측의 전략적 우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항우 군은 전투를 벌이는 동안 점점 병력이 소모되어 갔지만, 관중이라는 풍부한 보급기지를 갖고 있던 유방 군은 패전속에서도 불사조와 같이 전투태세를 다시 갖출 수가 있었다.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는 동안 소하는 후방에 머물면서 전선에의 보급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유방이 동으로 진군하여 관중 땅을 점령했을 때 소하는 승상이 되어 후방에 머물며 파촉(巴蜀) 땅을 공고히 다지고 군량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더우기 유방이 항우와 대결한 3년여 동안에 소하는 관중에 체재하면서 태자 효혜(孝惠)를 보좌하여 수도 역양(역陽, 역=手+樂)의 체제 정비에 임했다. 곧 법규를 제정하고 조묘(祖廟)와 궁전을 세워 지방 행정을 정비했던 것이다.

소하는 관중의 호구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전선에의 물자 보급을 체계적으로 행했다. 유방이 때로 패주하여 병력을 잃었으나 소하는 그때마다 관중에서 병력을 보충해 보냈다. 유방의 승리는 이러한 후방에서의 소하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매우 컸던 것이다.

BC 202년 드디어 천하를 통일하게 된 한의 고조 유방은 소하에게 법령 체계를 명하였는데, 소하는 고조의 뜻을 받들어 도율(盜律), 적률(賊律), 수율(囚律), 포율(捕律), 잡률(雜律), 구율(具律), 호율(戶律), 구율(廐律)의 9편으로 이루어지는 '구장율(九章律)'을 제정했다.

이 구장율을 제정할 때 기초 자료가 된 것은 바로 함양에서 접수해 두었던 진나라의 법령 문서가 되었슴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을 통일하였던 김유신이 백제나 고구려의 여러 사료들을 남김없이 불질러 없앤 것은 소하의 치적과 비교할 때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일설에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많은 컴플랙스를 갖고있던 신라가 후세에 대비해서 백제나 고구려의 흔적을 애써 지워버릴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백제나 고구려 또는 그 이전에 존재했던 부여 예맥 동예 옥저 졸본 낙랑 고조선 배달등의 사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를 않은가. 오로지 편협하게 기술된 중국의 사서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소하가 제정한 이 9장율은 '정율(正律)'이라고도 불리며,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약 420 여년에 걸쳐 가장 기본적인 법전으로 중시되었지만 그 내용은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아 많은 아쉬움이 있다.

한제국 건설 초기에는 반란이 끊이지 않아 이때문에 고조 유방은 반란을 진입하기 위하여 수도를 비울 때가 많았다. 이때마다 유방의 신임으로 내정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승상인 소하였다.

당시 한신, 진희, 팽월, 경포, 여관 등의 공신들은 원한을 산 자들의 밀고에 의해 반역죄로 숙청되는 일이 잦았다. 물론 소하도 예외일수는 없었기때문에 단 한 가닥의 의혹도 사지않기 위하여 처세에 신중을 기했다.

진희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유방이 수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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