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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영어를 배워야 할 사람들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2-02 1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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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영어를 배워야 할 사람들


오래 전 프랑크푸르트에서 파독 광원(鑛員)으로 독일에 살게 된 동포 ㄱ씨를 만났습니다. 하루는 딸 애가 김나지움(고교)에서 돌아오더니 엉엉 울더랍니다. 수업시간에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 딸은 독일에서 태어나 16년을 자랐습니다. 그는 아무리 말을 잘 해도 독일인 특유의 문화적 언어가 어느날 갑자기 원어민인 딸의 귀에 이방의 낯선 단어로 들려온 것이라고 한숨 쉬었습니다. 언어에 능통하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재야인사가 CNN과 인터뷰하면 영어 자막이 떴습니다. 자기 딴에는 꽤 한다고 영어로 말하고 싶었겠지만 의사전달이 안되니 자막을 깔아준 것이죠.

지금 이명박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영어교육에 무슨 혁명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온 나라가 소란스럽습니다. 정권 초기의 의제선점이라고 할까요. 고등학교만 나와도 생활영어는 막힘 없이 해야 한다는 목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막히지 않는다는 수준이 모호합니다. 길 물어보는 외국인 가르쳐주는 수준인가요, 아니면 한국 증시에서 무슨 주식 투자하면 좋을 것이라고 추천할 수준인가요. 몇 년 전에도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실현방안’이라는 것에 영어교육강화 대책이 들어있었습니다.

선견지명(?)이 있는 어느 소설가가 10여년 전에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주장한 것을 보면 지금의 영어강화론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일본에서도 영어를 제2언어로 하자는 주장이 있지만 별 호응은 못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주장들이 국제화 시대의 진정한 프로 일꾼 양성이라기보다 사교육비 30조원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는 영어교육 과소비의 급한 불을 끄자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점입니다. 영어 교육비는 왜 증가했나요. 유학을 가기 위해 학원은 필수였습니다. 기업들은 입사시험에 토플이나 토익 텝스같은 영어검정기관의 성적을 요구했고 개인은 보다 좋은 점수를 따기 위해 학원으로 몰렸습니다. 기업에서 볼 때 이런 검정기관의 좋은 점수가 꼭 영어 실력을 보장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새 대학을 휴학하고 영어권에 1년 정도 어학연수 가는 것이 기본이 되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다가도 더 좋은 직장을 가기 위해 어느날 갑자기 어학연수를 떠났습니다. 부모들은 허리가 휘면서도 내 자식만 뒤질 수 없다며 내보냈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필자의 조카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작년 수출로 294억달러 흑자를 올리고도 해외여행으로 158억 달러, 교육연수로 50억달러를 쓰는 바람에 경상수지흑자는 60억달러에 머물렀습니다. 아무리 국내에서 잘 가르친다고 해도 또 그렇다는 보장도 없지만, 해외 교육 붐은 막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해외로, 해외로 나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조선조 몇 세기 동안 펼친 쇄국정책의 당연한 반작용입니다.

국제화시대에 언어는 좋은 수단이지만 어설프게 쓰면 흉기가 됩니다. 80년대 초에 일본총리 나카소네가 미국을 방문하여 영어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과 통역 없이 전화통화를 할 정도여서 ‘영어의 나카소네’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결정적인 실수가 몇 번 있었습니다. ‘내실 있는 회담’ 즉 ‘fruitful talk’를 ‘fruit talk’ (과일회담)로, ‘미국대통령’을 ‘United States President’라고 하지않고 ‘united president’라고 하는 실수를 범했다는 것이죠. 그는 일본 매스컴의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공적인 장소에서 완벽하지도 않은 영어를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이었습니다.

반면에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앞두고 과테말라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총회에서 행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영어 불어를 섞은 연설은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IOC 공용어는 영어와 불어입니다. 그는 평창을 누르고 러시아의 소치를 개최지로 따냈습니다. 푸틴이 소치 유치의 원동력이 된 것이죠. 우리나라 노무현 대통령도 뛰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정말로 외국어 실력이 필요한 것은 국민이 아니라 지도자들이죠.

영어를 생업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입니다. 영어는 국제통용어로서 성공을 위한 자산의 하나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으로 다 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국민들이 목 매달아야 할 이유도 더욱 없습니다. 영어가 어디서나 통하는 것도 아닙니다. 난항을 거듭하던 아프간 인질사태를 해결한 국정원의 ‘선글래스맨’은 아프간 현지어에도 능통했다죠. 일본의 상사 주재원들은 주재국의 토속어까지 배웁니다. 필리핀이라면 말은 있으나 글은 없는 타가로그 어를 배우는 것이죠. 다양한 문화와 언어의 이해야말로 국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입니다. 이런 데서도 우리와 일본의 국제경쟁력 차이는 드러나는 게 아닌가요. 국제경쟁력은 넓고 얕게 아는 것보다 넓고 깊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근 미국은 주한 미 대사에 한국어가 능통한 평화봉사단 출신의 캐슬린 스티븐스를 임명했습니다. 미국이 영어만 잘해도 되는 한국에 왜 한국어를 잘 하는 대사를 임명했을까요. 미국은 이미 일본에는 1961년에 에드윈 라이샤워라는 학자를 임명했습니다. 한글의 영어표기법도 고안한 그는 일본문화와 역사에 정통했고 2차 대전 중에는 군사정보부 요원으로서 교토에 폭탄투하를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주재국 말을 모르고서는 그 나라의 속사정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주한 미 대사 임명의 의미, 영어 교육의 의의와 한계를 되새겨보기 바랍니다.

외국어 교육을 향상시키려면 학교제도를 바꿔서 외국으로 나갈 비용을 줄여야 합니다. 해외유학자를 우대하는 풍토도 사라져야 합니다. 학생들의 영어 능력향상은 수업능력이 천차만별일 몇 만 명의 영어전용교사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세계의 유수한 국제도시가 그렇듯이 국제적 인재를 기르고 싶다면 수익자 부담원칙으로 영어면 영어, 중국어면 중국어, 일본어면 일본어로 전과목을 가르치는 국제학교를 유치원, 초등학교 단계서부터 설립하고 교육시장을 개방해 학생들이 고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외국어 교육 제대로 시키려면 무엇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CNN BBC NHK CCTV 도이체벨레 프랑스2 같은 각국 공영 텔레비전 채널들을 케이블과 위성 텔레비전 사업자들이 의무전송하는 국제도시를 만들어야 합니다. 길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국어는 먼저 귀에 들린 뒤에 입으로 나온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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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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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2-20 05:53:39

    well said.  i wish more people think lik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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