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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에 이순하고
  • 뉴스관리자
  • 등록 2007-10-26 23: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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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과 보는 행위에 대해 몇 번 글을 쓰다 보니 귀에 대해서도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인체 중에서 글로 쓰기 좋은 소재는 그 첫 번째가 역시 눈이고, 다음이 귀가 아닌가 싶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 이 두 가지를 합쳐 시청각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것들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귀 이야기를 하기 위해, 1968년 봄의 고등학교 교실로 돌아갑니다. 별호가 설악산인이셨던 김종권 선생님의 한문 수업시간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최초로 국역하신 설악산인은 논어의 한 대목,…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하는 공자의 말씀을 엄숙하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한 명씩 지명해 해석을 시켰는데, ‘육십이이순’을 맡은 ‘굴뚝’이라는 녀석이 “60이 되면 귀가 어두워진다는 뜻입니다” 하고, 참 씩씩하다 못해 뻔뻔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얼굴이 하도 시커매서 별명이 굴뚝인 녀석입니다. 그날 보성고 2학년 3반 교실은 반쯤 뒤집어졌습니다. 설악산인은 장난친다고 화를 내셨지만, 우리는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며 웃었고 굴뚝마저 시커먼 얼굴이 벌겋게 되어 웃었습니다.

눈을 지긋이 감고 “忠言(충언)은 逆於耳(역어이)나 利於行(이어행)이요 良藥(양약)은 苦於口(고어구)나 利於病(이어병)이라”,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하는 데 이롭고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 치료에 좋다고 시 읊듯이 외우던 설악산인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 대목이 떠오른 것은 아마 이 말에도 귀가 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 이순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니 굴뚝의 엉뚱한 해석이 오히려 맞는 것 같습니다. 이순이란 세상 이치를 깨달아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단계인데, 귀가 그렇게 순해지는 것은 귀가 어두워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60세쯤 되면 귀의 기능이 쇠퇴하는 게 사실입니다. 더구나 공자 시절의 60세는 지금의 80세나 같을 것입니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잘 듣지를 못하니 남의 말을 거스르거나 다툴 일이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이가 들어 귀가 어두워지면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자기 말을 남들이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저절로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귀가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들리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나의 외할아버지는 귀가 들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성격이 낙천적이셨지만 들리지 않는 답답함이야 누가 어떻게도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우리 모두는 베토벤에게 큰 신세를 지고 살고 있습니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는 석고상점에 있는 그의 마스크를 길게 묘사한 대목이 나옵니다. ‘억세게 쥐어짠 듯한 온 몸의 감각을 단단히 매듭지어 놓은 듯한 얼굴, 끊임없이 발산되어 나가려는 음악을 악착스럽게 붙들어다 다지고 다져 응결시켜 놓은 듯한 얼굴,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리만 들으라고 신이 일부러 귀를 막아버린 음악가의 얼굴’, 그것이 베토벤의 얼굴입니다.

릴케는 계속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은)잡음이 빚어내는 혼탁과 허망에 정신을 팔지 않도록 하려는 신의 은총이었을 것이다.…그대의 예술 덕분에 인간은 굴욕으로부터 궐기하게 되었고 세계를 음악의 정기로 휩싸게 된 것이다.’

인간의 여러 감각 중에서 청각이 가장 오래 가고 마지막까지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말이 맞는다면, 의식 없이 누워 있는 환자들도 반응은 하지 못하지만 가족들이 안타깝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나는 병원에서 본 어떤 할머니를 기억합니다. “이 놈아, 네가 어떻게 내 앞에서 이럴 수 있니? 당장 일어나, 이 놈아!”하고 소리치던 할머니. 지팡이를 짚은 그 할머니는 홀어미로 살면서 어렵게 기른 외아들이 장가도 가지 못한 채 갑자기 쓰러지자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얼마나 일어나고 싶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기적처럼 환자가 소생할 것이라는 하염없고 속절없는 희망을 품은 채 “아무개야, 여보!” 하고 애타게 이름을 부르곤 합니다. 실제로 몇 년 만에 깨어난 환자도 있기는 있습니다. 어떤 집의 맏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동안 병원에 잘 가지 않았다는데, 3년 만에 깨어난 시아버지가 “아무개 에미만 안 왔다”고 말해 기절초풍을 했답니다. 환자는 말을 못 하지만 다 듣고 있고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2002년 11월에 갑자기 쓰러져 의식 없이 누워 계시다가, 생전에 남에게 보이지 않던 남루한 모습을 안쓰럽게도 다 드러낸 채 누워 계시다가 2004년 5월에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병실에 찾아가면 간병인 아주머니가 “할아버지, 아드님 오셨어요”하고 알리면서 나에게는 “아버지 좀 불러 보세요” 그랬습니다. 나는 머뭇머뭇하다가 간병인이 자리를 뜬 사이 아버지의 귀에 바짝 입을 대고 “아, 아버지”하고 불렀습니다. 여기서의 ‘아’는 감탄사가 아니라 말 더듬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의미있는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입맛을 다시거나 하품을 했고, 야속하게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떠나갔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목소리가 들리게 하는 내 성의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자기 목소리를 남에게 들려주는 간곡하고 인상적인 모습을 초등학교 때 어느 여성잡지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김경언의 네 칸짜리 만화입니다. 한 여자가 둑길을 걸어갑니다. 그 뒤를 한 남자가 따라갑니다. 둑길과 평행인 건너편은 기찻길입니다. 기차가 ‘뽀옥’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순간, 남자는 두 귀를 막고 “아이 러브 유!”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 수줍은 남자의 고백을, 기적소리에 묻힌 사랑의 외침을 여자는 분명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녀는 처음부터 그가 따라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만화의 어디에도 그런 설명은 없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남자가 너무 가엾습니다.

그는 왜 자기 귀를 막았을까요? 어려서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이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귀를 막는 것은 수줍음 탓이기도 하지만, 내가 들을 만큼의 소리도 남기지 않고 남에게 다 들려주려는 행동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누구 말이든 무엇이든 경청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1장 15절에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귀가 없는 사람은 없지만 사람은 저마다 듣고 싶은 것만 귀에 담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귀를 막고 자기 말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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