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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좀 이르다 싶은 아침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한국서 초등학생 하나가 유학을 오게 될 것 같은데, 어느 학교가 적당한 지, 그리고 어떻게 입학을 시키는 건지 수속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호주에서 좀 오래 살았달 뿐, 제가 무슨 전문적인 유학업무를 보는 사람도 아닌데, 자기보다 알면 얼마나 더 알겠습니까. 유학원에 직접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친구가 제게 전화를 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애 혼자 외국에 보내는 걸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가 있지?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뭘 안다고.. 자기 앞가림도 못할 나이에 무작정 유학을 보내기만 하면 일이 다 해결된데? “
이른바 대책없이 몰려드는 한국의 조기 유학생에 대해 아침부터 저하고 ‘열을 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더 정확히는 어린 자식들을 무작정 해외로 내모는 부모들을 성토(?) 하고 싶었던 게지요.
어떻게 그 학생을 알게 되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영어권 국가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라면 이민 가정이건, 단기 체류 가정이건 열에 여덟, 아홉은 한국의 지인들로부터 '아이들을 좀 데리고 있어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한번쯤은 받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외국 유학을 생각하고 있는 부모라면 보내고자 하는 나라에 자기 아이를 맡아 줄 만한 적당한 보호자를 물색하느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 마련인지라 거절 당할 때 당하더라도 '사돈의 팔촌' 한테 까지 ‘밀착 접근’을 시도해 보게 되는 것이지요.
저 역시도 이런저런 연줄에 얽혀 지금까지 모두 4명을 데리고 있어 봤습니다.
이웃에도 한국에서 온 남의 아이들을 ‘키우는’ 가정이 적지 않습니다.
영어 배운답시고 어린 나이에 혼자 이국 만리에 와 있으니 그 아이를 부모대신 ‘키우고 있다’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그나마 현지의 믿을 만한 한인 가정에 아이를 맡길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한국에 있는 부모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정이 딱해 질 수도 있습니다.
학교에 따라서는 현지 생활에 빠르게 적응시킨다는 명분으로 일정기간은 호주인 가정에서 지낼 것을 반강제적으로 권하는데, 음식은 물론이고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분위기에서 어린 학생들이 겪는 고충과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게 됩니다.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중인 한 한국 어린이는 수돗물도 시원스레 틀지 못하고 겨우 '똑똑' 흐르게 해놓고 세수를 했다고 했습니다. 세면기 주변이나 욕실에 물이 튀는 것을 유난히 싫어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습벽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워낙 조심을 하다 보니 얼굴 한번 닦는데도 초긴장을 하게 되더라는 것이죠.
그런가하면 같은 나이의 또다른 어린이는 호주 가정에 들어간 첫날 아침, 그 집에서 한국학생이라고 일껏 배려한 듯 한국 라면을 주더랍니다. 그런데 끓여 먹어야 할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으라고 했다죠. 물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즉석라면과 끓여야 하는 라면의 차이를 영어로 설명할 줄 몰라 하는 수 없이 '물에 불은 생라면'을 씹어먹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호주인 하숙집 아이가 하도 짓궂게 구는 바람에 함께 외출한 틈을 타서 무작정 냅다 뛰어 도망을 치다 경찰에 잡혀 다시 그 집으로 ‘끌려가면서’ , 집에 돌아 가고 싶다고 꺼이꺼이 울던 한 초등학생을 직접 본 적도 있었습니다.
영어 공부는 고사하고 부모들의 과욕으로 어린 정서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줄 수 있다는 조기 유학의 문제점에 대한 우려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쯤되면 어린 것들을 그 고생시켜가면서 꼭 유학을 시켜야 할까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이와는 아랑곳 없이 지난 해 한국의 조기유학생 숫자가 3만명에 육박했다고 하니 대세는 또 그게 아닌가 봅니다.
호주는 무작정 유학 길에 오른 철부지들의 정서상의 불안정과 애정 결핍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떤 지역에서는 초등학생 유학은 부모 동반에 한해서만 허용하고 중학생은 친척, 친지가 돌볼 경우에만 유학 비자를 발급토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하숙이나 자취 등 독립적 형태의 일반적 유학생활은 만 16세에 해당하는 고등학생부터 허용하고 있구요.
그런데 이건 또 웬일입니까. 호주의 초등학생 유학비율이 큰 폭으로 늘어난 가운데, 남부 호주에는 한국 초등학생들의 숫자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많은 한국 어린이들이 모두 부모와 함께 체류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역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기는 하지만 초등생 부모동반 유학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을 지도 모르고, 법 따지기 이전에 부모와 함께 생활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의 정서적 굶주림은 어떻게 채울 것인지요.
만약 목숨처럼 소중한 ‘ 내 아이’를 그깟 유학을 시키기 위해 외국에 혼자 두는 것은 아이의 장래에 어쩌면 위험천만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걸 한국의 부모들은 정녕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일까요.
신 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
블로그 http://biog.naver.com/ayoun63 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