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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2)
  • 뉴스관리자
  • 등록 2007-09-18 14: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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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작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청량리역에서 영동선 기차를 타고 강원도 오지를 넘어 동해 바다에 닿는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고 싶었던 마을은 평창, 영월, 정선, 태백이었습니다.

평창(봉평)은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기억으로, 태백과 정선의 아우라지는 강원도의 오지여서 언젠가 한번은 꼭 들러 산에 묻혀 버린 그곳의 정서를 느끼고 싶었습니다.

영월은 어려서 「단종애사」 영화를 보면서부터 가고 싶었고, 섬진강 낙동강을 보았으니 필히 동강을 보아야 한다고 결심했던 이유가 크게 작용을 하였습니다.

지난해 늦가을 한국 방문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여행은 꼭 해내겠다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청량리에서 열차로 10시간을 타야만 동해안에 닿는다는 스케줄에 자신이 없어서 결행을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정을 조금 바꾸기로 했습니다.

일단 중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영월로 향했습니다. 11월의 한적한 영월역 앞 조그마한 식당에서, 깔끔하신 할머니 한 분이 다슬기탕에 주신 밥을 맛있게 먹고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영월의 추운 밤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동강 다리 위에 서서 흐르는 물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동강 안, 깊숙히 들어가고 싶었던 오랜 희망은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강 내부까지는 래프팅으로 들어가야 한다니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지만, 마치 내게 “너 날 보러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지!“ 하듯이 흐린 달빛에 반사된 동강의 물빛은 동강의 자존심인 양 아주 진중하게 빛나고 있어 반가웠습니다.


단종이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는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청령포에 잘 왔구나 하는 감회에 젖습니다. 강 건너 모래사장 뒤로 쭉쭉 뻗은 훤칠한 소나무들이 잘 생긴 모습으로 멋지게 무리를 지어 서 있었습니다. 국내를 돌아다니던 중 그 많은 소나무 무리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 것은 그곳이 처음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살다 짧은 삶을 마무리했던 슬픈 단종을 부러워할 정도였으니 그 청령포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월에서 정선읍을 거쳐 여량 땅까지 두 번 버스를 타고 가야 비로소 아우라지 강을 만납니다. 당일로 다녀오기는 힘들어 1박을 하기로 했습니다. 정선에서 여량까지의 풍경은 섬진강 가, 낙동강 가에서 보고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힘차게 위로 솟은 태백 줄기의 봉우리들은 아직은 덜 때 묻은 자연의 보고로, 나무들과 바위, 모래무지, 꾸밈없이 생긴 돌멩이들, 그리고 잔잔한 길을 따라 흐르는 아우라지 강과 함께 절경을 보여 줍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의 자연미, 우리만이 가진 아름다움입니다.

아우라지 강가에 앉아 시린 물에 손을 담그니, 초겨울의 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이 오지의 숙명적인 고독감이 그 강의 물결이 되어 가슴을 적셔왔습니다.

다시 영월로 돌아와, 영월역에서 동해안으로 향하는 고물 기차에 탔지만 평소의 소원을 이룬다는 기대에 가슴이 설렜습니다. 기차는 수 시간을 꼬불꼬불 산과 계곡을 돌고 돌아 태백 사북을 지납니다. 장엄한 빙설이 덮인 산이나 그림 같은 호수는 없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험하고 거친 산과 뻗다 말아버린 구부러진 나무들이었으나 태백산맥이 주는 근엄하고 엄숙한 풍경은 한국만이 가진 아름다운 정서였습니다. 해안에 닿을 때까지 동양화를 보는 듯 거의 태백산맥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시간의 흐름을 몰랐습니다.


자그마한 한 두 그루의 소나무가 고즈넉이 서 있는 정동진역에서 내려 홀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습니다. 때가 초겨울인지라 스산한 겨울바다는 갑자기 심한 외로움을 동반했고, 겨울바다를 좋아했던 젊은 날, 나의 초상은 어디로 흩어져 가버렸는지, 누구라도 옆에 있었으면, 아 이제는 홀로의 여행이 지난 날같지가 않구나, 따뜻한 차, 따뜻한 음성이 그리워졌습니다.

인적 드문 을씨년스러운 모래사장을 걷다 차 한 잔이 있을까 하여 초라한 간이 음식텐트에 들어섭니다. 차는 없고 소주는 있었는데 이제 소주 몇 잔 마실 수도 없어져, 세파에 찌들어 곰삭은 파김치 같은 아주머니의 한 섞인 푸념만 한동안 들어주었습니다.

정동진역에서 강릉행 기차를 기다리는데, 역 남쪽에 곶처럼 자리 잡은 약간 높고 아름다운 언덕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괴물입니까. 이 소담하고 조용한 작은 마을, 역 앞,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그 언덕 위 선박모양의 하얀 건물이었습니다. 물어보니 식당과 호텔이었습니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무시하고 그 언덕을 제압하듯이 서 있는 거대한 빌딩을 설계한 사람은 누구이며, 그러한 허가를 내어준 관청의 인물은 누구인지, 바닷가와 맞닿은 조촐한 정동진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건물이 실망스러워 허물기를 바랐습니다. 정말 카사 비앙카,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말이 무색했습니다.

척산의 온천장에 머무르는 동안 설악, 미시령까지의 나들이가 버스로는 시간 허비가 심하여 속초에서는 차를 빌렸습니다. 매일 설악산으로 출근을 합니다. 권금성까지 올라가 거기서 보는 하늘은 구름은 어떤가, 바람은 또 어떻게 산을 흔드는가 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내려옵니다.


가물어 드러난 바위들 사이에 앉아 고개를 들면 잎이 떨어진 활엽수와 소나무들로, 봉우리를 뻗치고 있는 험하지만 섬세한 산들과 계곡이, 서양의 산들과 나무와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동양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의 모습, 설악은 한국만이 가진 유일한 자랑이자 긍지입니다.

그것은 이곳 캐나다 밴프나 재스퍼에선 볼 수 없는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같은 동양문화권인 일본에서조차 설악의 모습은 찾기 어렵습니다. 신흥사의 절 방에서 마시는 대추차의 향기와 즐거움은 사뭇 컸습니다. 아니 동양적인 그 고요함이 그리웠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울산바위를 올라가다 중간 지점에 이르니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국립공원 깊은 곳에서 술장사를 하고,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쉬면서 술을 마십니다. 그리고 휴지들과 깨진 술병들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신흥사 절의 소유 땅이라 국립공원 안 깊은 곳이라도 제재를 할 수가 없다 합니다.

국립공원은 그 국가의 자랑이며 얼굴입니다. 국가가 있고 국립공원이 있고 그 다음 사찰이 있는 것일 텐데, 이곳은 법도 미칠 수 없는 무법의 사각지대일까요? 이 아름답기로 제일 가는 설악에 이렇게 술때가 끼다니…. 상혼에 찌들어 가는 자연의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비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가까운 일본만 하여도 시립이나 도립공원조차 시민 모두가 협조하여 깨끗이 잘 가꿉니다. 캐나다의 작은 한 주 만한 면적의 밴프 재스퍼 국립공원을, 5일간 돌아다니던 중, 미네완카 호수 안 피크닉 장소의 네 조각의 휴지가 눈에 띈 오물의 전부였습니다.

여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몇 년 전 새로 중창했다는 신흥사의 지붕에 올려진 청기와였습니다. 깊은 산 속의 오랜 고찰들은 고색창연하고 중후한 색상들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야 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만, 이 절의 주지스님께서는 청와대의 주인이 되고 싶은 꿈을 꾸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름답다는 한국의 사찰들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이런 청와대 지붕은 또 금시초문이었습니다. 더러는 수덕사처럼 바벨탑을 쌓는 건지 천당 가는 길을 만든 건지 돌층계를 아득히 높이 만들어 절의 자연미를 죽이는 절도 있지만(이번 소식에 의하면 그 돌층계를 치웠다니 다행임) 파괴된 자연미가 다시 살아나겠습니까?



더욱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머무르고 있던 호텔 주변의 식당에서 파는 식사였습니다. 언제부터 인심이 그리 사나워졌는지 매일 먹을 수 있는 따스한 백반을 찾을 수 없었고, 높은 가격의 알 라 카르테(일품) 식단뿐이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밥, 그것도 메뉴가 별로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매일 거의 같은 음식을 고역스럽게 먹든지, 아니면 모든 식당이 하고 있는 싼 식단, 순두부만 매일 먹어야 합니다. 인심 좋은 한민족이 언제부터 무섭게 변해버렸을까요?

떠나오기 전 날은 평소에 그리워했던 미시령을 찾아갔습니다. 이름조차 고왔던 미시령의 아름다움은 편리함만 좇는 고속도로 개발로 깎아 내린 바위산, 헐벗겨진 숲들이 전쟁의 잔해처럼 널려 있었습니다. 잔잔히 흐르는 개울을 끼고 조용히 숨어 반기던, 작고 좁은 숲에 싸인 길을 졸랑졸랑 조랑말을 타고 슬렁슬렁 넘어야만 제 멋이 날 것 같던 미시령의 아름다움은 떠나버렸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을 홀딱 벗겨 무참히 개울가에 던져버린 것 같아 황당했고 슬펐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자 다시 찾아간 미시령 고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로 돌아오며 마치 돌아올 고향을 잃어버린 듯 하여 마음이 저려왔습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시간이 좀더 걸려도 우리만의 문화유산과 자연을 지킬 수 없는지 모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번 파괴해버린 자연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서는 백년, 천년의 세월이 걸린다는 것을 파괴 전에 더 심사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들이 자국의 유산과 전통을 얼마나 소중히 아끼며 지켜 나가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유치원 교육부터 철저히 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글쓴이 오마리님은 샌프란시스코대학에서 불어, F.I.D.M (Fashion Institute of Design & Merchandising)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후 미국에서 The Fashion Works Inc, 국내에서 디자인 스투디오를 경영하는 등 오랫동안 관련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 그림그리기를 즐겼으며, 현재는 캐나다에 거주하면서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많은 곳을 여행하며 특히 구름 찍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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