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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 국무총리 이홍구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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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3-03-11 15:44:32
  • 수정 2023-03-12 14: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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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현인(賢人)이면서 외유내강의 정치지도자 이홍구의 삶으로 그려낸

한국정치학의 ‘대동여지도’를 만나다!


전 국무총리를 지낸 효당(曉堂) 이홍구 교수의 인생과 업적을 모두 다룬 책, 《이홍구 평전》이 출간됐다. 이 책은 이홍구 교수가 그간 한국 정치학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또 정치전기학 또는 정치리더십의 시각에서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지, 대북·통일문제와 대외관계에서 거둔 그의 괄목할 만한 성과의 원천은 무엇이었는지, 글로벌 리더의 반열에 올라선 성과를 뒷받침한 것은 과연 무엇인지, 출중한 업적에 버금하는 그의 인품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총 5가지 물음에 대한 분석과 대답을 모두 담은 책이다.


이홍구는 1988년 2월부터 2000년 8월까지 12년 6개월에 걸쳐 대한민국 정치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대통령부(大統領府)에서 대통령정치담당특별보좌관으로 봉직했고, 내각에서 국토통일원장관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및 통일부총리를 거쳐 마침내 국무총리에 올랐으며, 국회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함과 아울러 신한국당 대표위원으로 집권여당을 이끌었다.


1997년 12월에 실시될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신한국당의 경선에도 참여했다. 그는 또 주영대사와 주미대사를 차례로 맡아 외교현장의 일선에 서기도 했다. 그러면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그리고 동시에 화려하게 활동한 그는 정치전기학 또는 정치적 리더십이라는 시각에서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그 물음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평가를 내놓는다.


제1장은 출생(1934년)으로부터 도미 유학 직전(1954년)까지의 20년을 다룬다. 서울의 전형적인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기본적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 8·15해방을 맞은 그는 중학생 때 좌·우익 투쟁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목격했으며 고등학생 때 6·25전쟁을 겪었고 대학생 때 휴전을 보았다. 유교교육의 내용에, 역사적 격변을 현장에서 체험하며 터득한 깨달음을 결합해 그는 자신의 인생관(人生觀)·세계관(世界觀)·국가관(國家觀)·정치관(政治觀)의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다.


서로 연결되는 이 관념들은 그의 개인생활에 대해서도 그러했지만, 특히 그의 공직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1장은 그가 받은 유교의 가르침 그리고 그가 터득한 깨달음이 무엇이었는가에 대답한다.


제2장은 에모리대학교(Emory University) 입학(1954년)으로부터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1968년) 14년을 다룬다. 그사이에 그는 에모리대학교에서 방문조교수,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교(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에서 조교수로 봉직했다.


이처럼 긴 시기에 그는 누구의 무엇을 누구로부터 배웠고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무엇을 전수했는가? 그가 배운 정치학은 구한말 이후의 정치학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제2장은 이 물음에 답하고 있다.


제3장은 그의 귀국(1968년)부터 유신체제 등장 직전(1972년)까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봉직하는 가운데 발표한 저술들의 분석에 초점을 맞춘다.


주요 학술지들과 그리고 사회적 요구에 따라 국내의 유력지들에 발표한 그의 논설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하는 ‘근대화’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명하는 가운데 박 대통령이 주로 물질적 성장에 치중하는 ‘근대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근대화’ 아래서는 ‘인간소외’가 깊어질 것이기 때문에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논평했다


. 같은 맥락에서, 그는 박 대통령이 ‘근대화’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행정의 효율성을 앞세우며 정치를 희생시키는, 이른바 ‘정치의 비정치화(非政治化)’를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정치의 회복’을 일관되게 제의했다.


제4장은 유신체제의 등장(1972년)으로부터 박 대통령의 ‘시해’에 따른 유신체제의 붕괴(1979년)까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봉직하는 가운데 발표한 저술들의 분석에 초점을 맞춘다. 대학과 지식인사회에 대한 공안기관의 통제가 그 이전에 비해 훨씬 강화됐던 이 시기에도 그는 ‘국민참여의 확대’를 통한 ‘정치의 회복’을 제의했다. 동시에 1975년에는 국제학술회의에서 남북한의 통일방안으로 ‘코리안 코먼웰스(Korean Commonwealth)’안을 제의했다.


제5장은 유신체제 붕괴(1979년)로부터 제6공화국 출범(1988년) 직전까지의 시기에 여전히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봉직한 그의 언행들과 저술들을 분석했다.


유신체제가 붕괴하면서 곧바로 개헌 논의가 활발해지자, 한국방송공사(KBS)는 헌법 개정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몇 차례 열었는데, 그때마다 좌장을 맡은 그의 토론회 진행방식과 발언 내용이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 특히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선봉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정치지도자 모두 직선대통령제로의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 선출되려는 강한 집념을 보이는 상황에서, 이제 우리나라는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역설한 그의 발제는 학계와 언론계를 포함한 지식인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12·12 군사반란을 거쳐 제5공화국 수립을 주도한 신군부는 국민 사이에 인기 있는 그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 한 보기로, 그를 상대로 우선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으로 들어온 뒤 문교부장관 또는 국토통일원장관 또는 외무부장관으로 일했으면 좋겠다고 당시 실세 가운데 꼽히던 몇몇 요인이 끈질기게 회유도 하고 ‘협박’도 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미소로써 거절했다.


제6장은 민주화를 개시한 제6공화국의 첫 대통령인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이끈 정부에서의 공직생활을 다룬다. 그는 노 대통령의 권유를 받아들여 국토통일원장관으로 입각해 자신의 개인적인 구상이었던 ‘코리안 코먼웰스’안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으로 다듬어 정부의 통일방안으로 공식화했으며 국회의 여러 정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아내 적어도 그 국내적 기반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는 곧 대통령정치담당특별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주영대사로 봉직했다.


제7장은 제6공화국의 두 번째 대통령인 김영삼 대통령 정부에서의 공직생활을 다룬다. 그는 주영대사를 떠나 귀국한 직후 대통령 자문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부총리급)으로 출발해 통일부총리로 봉직했다. 통일부총리로 봉직하던 때인 1994년 6월에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은 미국 카터 전 대통령의 알선에 따라 7월 하순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홍구 부총리는 곧바로 판문점에서 북한 대표단과 회담하고 남북정상회담을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의제를 놓고 개최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를 여덟 시간 만에, 그것도 북한에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고 끌어냈다


. 그러나 김일성이 뜻밖에 1994년 7월 8일에 사망함에 따라 이 합의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 부총리는 곧 국무총리로 기용됐으며, 1996년 4월에 실시된 15대 국회에 여당인 신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신한국당 대표위원으로 활동했다.


제8장은 우선 제6공화국의 세 번째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이 이끈 정부에서의 공직생활을 다룬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을 때 이홍구 전 총리는 신한국당 대표위원이면서 국회의원이었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난 외환위기의 수습을 위해 당시 미국 행정부를 이끌던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해 그 보좌관들과 가까운 이 전 총리의 역할이 긴요하다고 판단해 주미대사직을 제의했고,이 전 총리는 ‘6·25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으로 불리던 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조한다는 공인으로서의 마음가짐으로 그 제의를 받아들여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로써 그는 직업공무원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 및 김대중 대통령 등 세 대통령을 모시고 고위직에서 일한 특유한 경력을 보여주었다.



이어 2000년 8월에 주미대사를 사임하고 귀국한 이후, 앞에서 설명했듯, 여러 분야에서 국가원로로 밟은 길을 다룬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실현하고 그것을 굳히기 위해 과거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북한에 대해서도 핵무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개혁과 개방의 길로 스스로 전환할 것을, 그리고 서방세계는 북한의 전환을 유도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이 책의 논점들을 정리하고 동시에 그의 인품에 대한 여러 사람의 증언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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