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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괜찮다, 괜찮다. / 김영민
깊은 밤, 혼자 속상하고 답답해서
그리운 것도 많고 잊어야 할 것도 많아
보고 싶은 사람 있고 미운 사람 있어
울적해 눈물 핑 돌아도 함께 마셔 줄 사람
굳이 찾으면 전혀 없지야 않겠지만
정작 지금은 혼자라서 혼자 술병을 비웁니다
기분 안 좋아 기분 풀려고
사는 게 참 빡빡하고 쉽지 않아서
용기 내고 기운 차려 보려는데
수치스럽고 부끄러워 혼자 술을 마십니다
외로워서 쓸쓸해서 고독해서
한 살 두 살 나이 먹는 게 서러워서
별별 이유로 차라리 숨었으면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고 혼자니까 혼자 술을 마십니다
혼자 술을 마실 때는
금방 배불러 지는 맥주나 텁텁한 막걸리보다는
마실 때 입안부터 발끝까지 찌릿해지는 소주가 젤입니다
소주를 마시면 감 냄새가 납니다
아주 잘 익은 홍시 냄새가 납니다
그 냄새, 잘 익은 홍시감 냄새는 내 아버지 냄샙니다
낮이나 밤이나 항상 불 그래한 아버지 얼굴에서는
잘 익은 홍시감 냄새가 났었습니다
한잔 두잔 비우다 보니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서 별들이 쏟아집니다
쏟아지는 별들이 견우직녀 오작교 놓듯
나 혼자 앉은 술자리로 타닥타닥 별꽃 가루 튀우는
무지개 다리를 판타지 영화 장면처럼 놓았습니다
그 다리 저쪽 위에 서신 듯 허공인 듯한 곳에
아버지가 애처로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아들아 괜찮다, 괜찮다
아버지, 아버지...
살아생전 그놈의 감 냄새 밉고 싫어서
단 한 번도 아버지하고 살갑게 불러보지 못하고
지금 아들이 이렇게 그 감 냄새를 풍기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괜찮다, 괜찮다 하십니다
그때 아버지 텅 빈 세상 곁에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세상 누구 하나
의지는커녕 말벗 되어줄 이 없었겠지요
그때 아버지도 얼마나 고단하셨겠는지요
그때 아버지도 얼마나 외로우셨겠는지요
그런데 그때 이 아들은
그러시는 아버지가 나쁜 줄 알았습니다
엄마 고생시키면 나쁘고 자식들 배 골리면 나쁘고
세상 뒤처지면 안 되고 세상 낙오하면 안 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 나쁜 줄 알았습니다
다른 아버지는 다 좋은 아버진데
내 아버지만 나쁜 아버진 줄 알았습니다
그럴 수 있는데,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데
그래도 되는데, 얼마든지 그래도 되는데
나는 아침마다 아버지 머리맡에 놓인
빈 술병들과 홍시감 냄새가 원수보다 싫었습니다
내가 술병을 비웁니다
혼자 술을 마십니다
깊은 밤, 잠 못 들고 그 맡기 싫었던
잘 익은 홍시감 냄새를 풍깁니다
아들아 괜찮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