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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美學)’을 찾아서-걸어서 탐라(耽羅) 일주(1)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3-20 18: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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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美學)’을 찾아서-걸어서 탐라(耽羅) 일주(1)



이윽고 비행기가 1만m 고도의 상공으로 떠올라 안정된 궤도에 진입했습니다. 김포공항을 출발, 제주로 가는 대한항공 1221편 국내선.

조금 전 좌석을 배정해 주던 체크인카운터의 아가씨가 보여준 친절이 허구였음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가 입가를 스쳤습니다. 특별히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좀 더 편하게 가실 수 있도록 비상구 근처의 자리를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다리를 마음대로 뻗으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농구선수 출신으로 다리가 긴 후배 Y씨가 비행기로 여행할 때마다 그런 편한 좌석의 번호를 아예 외워 두었다가 특별히 요청하던 모습을 익히 보았던 터라 옛날 생각도 나고 아가씨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상쾌한 기분으로 탑승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좌석은 그런 배려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창가의 비좁은 자리였습니다.

‘너무 경황이 없어 순간적으로 착오를 일으킨 것이겠지,’ 너그럽게 생각하고 스스로 기분을 전환하는 사이, 이제 궤도에 진입했으므로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도 좋다는 시그널이 승객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습니다.

그 평안함 속에서 하나의 상념(想念)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아, 이제 바야흐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엉뚱한 일을 저돌적으로 시작하는 셈이구나.’ 그렇습니다. 내가 이번 거사(擧事) 계획을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털어놓았을 때 한결같이 의아한 표정들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제주도를 해안선 따라 걸어서 한 바퀴 돌기-.’ 떠나기 전 나는 가급적 많은 친지들에게 이 계획을 털어놓았습니다. 혹시 마음이 약해져 차일피일 미루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포기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먼 길을 걸으려 하느냐? 차라리 자전거를 한 대 빌려서 그걸 타고 한 바퀴 돌지 그러느냐”는 회유성 질문도 많이 받았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선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서울에 있어도 자유롭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자유를 추구하고 싶었습니다. 일상(日常)의 틀을 완전히 깨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걷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느림의 미학(美學)’을 실천해 보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는 ‘빠르게, 더 빠르게’가 가장 강력한 키워드입니다. 여행수단도 통신수단도 정보전달방법도 날이 갈수록 ‘더 빠르게’를 추구하면서 눈부시게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그게 꼭 좋은 것인가. 빠르게 달려가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세상사 모든 일은 긍정적 측면과 아울러 부정적 측면도 있습니다. ‘빠르게, 더 빠르게’를 배경으로 하는 주마가편(走馬加鞭)은 좋은 뜻이지만 주마간산(走馬看山)은 부정적 의미를 지닙니다.

빨리 가야할 필요가 있을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가는 게 좋을 때도 있습니다. 기나 긴 인생길에서는 천천히 가면서 더 크고 좋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을 듯싶기도 합니다. ‘느림의 미학’이 안겨 주는 선물일 것입니다.

내 습관 중에 주위 사람들을 진짜 웃기게 만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전부터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삶의 패턴이어서 요즘 완전히 습관으로 정착시킨 일인데 다름아닌 ‘옛날 신문 보기’입니다.

이 세상에 나만 하는 짓이어서 듣는 이들이 얼른 납득하기 어려울 텐데 신문을 쌓아 놓고 읽지 않다가 오래 지난 다음 하나하나 읽어 나가는 방법입니다. 지금은 2004년 12월의 신문들을 읽어 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뉴스에 관한 한 나는 4년 전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더 빨리‘가 최고의 키워드인 사람들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이겠으나 지난 신문을 꼼꼼히 읽어 가다 보면 훨씬 재미도 있고, 세상 돌아가는 판세가 제대로 보이면서 보다 너그러운 시각으로 보게 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느림의 미학’은 그래서 좋습니다.

장구한 세월, 같은 방법 같은 속도로 제주도 해안을 어루만지고 있는 파도의 변함없는 ‘느림의 미학’을 찾아 비행기는 남해 상공을 날고 있었습니다.







필자소개



최창신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다.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태권도신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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