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

작성일 : 07-02-09 17:53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글쓴이 : 이문기
조회수 조회 : 4,029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지은이: 윤동주
출판사:


차   례
=======
시인 약력
해설
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서시(序詩)
자화상(自畵像)
소년(少年)
눈오는 지도(地圖)
돌아와 보는 밤
병원(病院)
새로운 길
간판(看板) 없는 거리
태초(太初)의 아침
또 태초(太初)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時間)
십자가(十字架)
바람이 불어
슬픈 족속(族屬)
눈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故鄕)

별 헤는 밤
2. 쉽게 씌어진  시(詩)
초 한 대
내일은 없다
삶과 죽음
거리에서
창공(蒼空)
조개 껍질
참새
고향집
비둘기
황혼(黃昏)
이별(離別)
모단봉(牡丹峰)에서
가슴1
가슴2
종달새

산상(山上)
오후(午後)의 구장(球場)
산림(山林)
호주머니
양지(陽地)쪽
꿈은 깨어지고
곡간(谷間)
햇비
빗자루
비행기
무얼 먹고 사나
굴뚝

버선본
오줌싸개 지도
편지
기왓장 내외
황혼(黃昏)이 바다가 되어

달밤
풍경(風景)

그 여자(女子)
한난계(寒暖計)
소낙비
비애(悲哀)
명상(瞑想)
바다
산협(山峽)의 오후(午後)
비로봉(毘盧峰)
창(窓)
유언(遺言)
반딧불
거짓부리
산울림
비오는 밤
이적(異蹟)
사랑의 전당(殿堂)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코스모스
고추밭
햇빛·바람
애기의 새벽
해바라기 얼굴
귀뚜라미와 나와
달같이
장미(薔薇) 병들어
산골물
위로(慰勞)
팔복(八福)
간(肝)
참회록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追憶)
쉽게 씌어진 시(詩)
트루게네프의 언덕
흐르는 거리
3.  달을 쏘다 (산문)
달을 쏘다
별똥 떨어진 데
화원에 꽃이 핀다
종시(終始)
==== 직지 머리글 ====

 

시인 약력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출생하여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였고 일본  동경 동지사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에 발표하였으며 1941년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를 간행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1945년 구주 복강(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한 후 유작 「쉽게 씌어진 시」가 경향신문에 발표되었으며 유고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955년에 간행되었다.

 

해설


순결한 혼의 시인 윤동주
신동욱(문학평론가·연대교수)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에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집안은 시인의 할아버지 대로부터 기독교를 신봉하였고, 시인의 아버지는 교원이었다고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북간도 지역은 애국지사들이 모여살던 곳으로서 일제 치하에 서로 민족의 일체감을 결속하며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었다. 시인의 친아우 윤일주씨의 「선백(先伯)의 생애(生涯)」를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한 것 같으며,  그의 성품은 겸허하고 관유(寬裕)하고 온화하였고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 배경과 성격적인 면을 고려한다면 그의 시세계가 보이고 있는 서정의 핵심들이 기독교적인 신앙과 관련된 것들이라 짐작되며, 내성적 성품과 민감한 감수성이 창조적 힘이 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보이는 시상(詩想)에서 그의 생활 체험은 승화되고 내면화된 서정으로서 그 특징을 가지는 한편, 부단히 불행한 시대 속에서 사는 젊은이로서 자기확신을 지속시키려고 노력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자기확신의 방법은 밖의 세계와의 관련에서  서정적 주체자(抒情的主體者)의 성찰이 위주가 되고 있다. 그의 유명한 「서시(序詩)」를 보면  그러한 시인 의식이 명징하게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작품은 시인이 24세 때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작품 속에 나타난 화자는 스스로에게 일생 동안 부끄러움이 없는 순결한  삶을 지향하려는 도덕적 결의를 다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 보이는 탁월한 형상적 특질은 시인의 창조적 기량의 우수성을 이해케 하는 데 주요한 관건이 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독자에게 공감을 유발하는  점도 바로 그의 높은 형상성에 있는 것이지만, 그와 못하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공감유발의 요체는 시인의 경건하고 순결한 신앙인의 자세에 있다 하겠다.
인용된 시에 보이듯이, 범상한 한 자연현상인 바람과 나뭇잎과의 관계를 통하여 화자의 도덕적 결심에 추호의 흔들림이 있어서도 안 되겠다는 다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자연현상 속에 숨은 시적 진실을 찾아내는 통찰력이 보인다.
기독교도로서의 자아성찰의 시상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 이르러 범우주적 사랑의 의식으로 확대되고 있다. 즉 서정적 자아와  불행한 생명들과의 통합현상이 이루어지는데 그 통합의 힘은 기독교적인 사랑에 근거한 인도주의  사상의 발로라고 하겠다. 그리고 스스로 부여받은 삶의 길을  충실히 걸어갈 것을 다짐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내적 충실을 지향하는 시인 의식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물론 이 시인은 1945년 2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되었으므로 긴  생애를 통하여 사상적 발전을 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독자적인 사상성을  시를 통하여 나타내었다. 순결한 자아의 성숙과 범우주적 사랑의 의식은 윤동주 시인이 지녔던 그의 독자적인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 특징은 여러 작품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의  「자화상」 앞에서 예를 든 작품보다는 좀 이른 시기에 쓰인 작품이지만, 시인의 순결성에의  지향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데, 이러한 순결성은 그의 도덕적 견실성을 위한 정신적  훈련의 특징으로 나타난다고 하겠다. 왜 이처럼 시인은 도덕적 확립을 꾀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은 단순히 이해될 바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필자의  느낌으로는 세속적 삶의 부도덕성과  특히 일제의 야비한 식민지 정책 등에서 빚어지는, 비인도적이고 비도덕적인 만행들과 대립되는 시인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된다. 이를테면 식민지 치하의 세계가 비가치로 인식될  때 그러한 비가치에 동조하지 않고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부단히 성찰하는 지속적인 정신훈련으로써 도덕적 자아의 확립을 꾀한 것이라고 풀이된다. 그의 「자화상」에 보이는 주요심상은 우물, 달, 구름, 파아란 하늘, 바람  등인데 이러한 천연의 물상들은  욕망의 인간으로서의 세속적 자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순수한 가치대상이며 화자와 대비가 되고 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순수한 자연적 질서로서의 여러 물상들과 한 인간으로서의 <사나이>의 대비에서  서정적 화자에 의해 사나이가 미워지는 것은 자연의 순수성과 같이 자신이 순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또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한계의식에서 빚어지는 자아반성의 감정 표현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자아성찰의 지속적 운동에서 미움과 가엾음의 감정이 교차되는데, 이러한 곳에서 윤동주의 정신적 갈등과 고뇌가 교차됨을 볼 수 있고, 그것을 진솔하게 말하는 성실성의 아름다움이 보인다고 하겠다. 현실적 존재로서의 시인은 부단히 순수한 세계에 접해가려고 하며 자신이 바로 그 자연의  본성과 동질화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같다. 이러한 시인의 모습에서 그의 내면 생활의 진지함과 정직함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부단히 성실성을 다하여 부정적 세계와 겨루며 맞서서 자아의 도덕적 완성을 시도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부정적 세계의 거대한 힘과  그 지속은 끝나지 않았으므로 시대 전체에 대한 자아실현의 한계를 인식하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자아의 도덕적 완성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여 자연적 순수성에 동질화하지만 현실적으로 자기 존재가  확립할 근거로서의 삶의 공간이 불확실하고 불분명함을 의식하기에 이르고, 즉 도덕적 완성과 함께 자기 존재의 근거지의 문제가 일제 치하의 피지배 민족의 구체적 고통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한 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무서운 시간(時間)」

이러한 화자의 표백을 통하여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확실히 보장된 근거처가 없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이 시인의 시대 인식은 그의 종교적인 경건성과 도덕적 완성을 위한 부단한 정신훈련과 아울러 통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처의 불확정성에서 존재의 근원적 비극성이 시대의 부정적 의미와 관련되어 해명되고 있다.  시대 인식과 자아실현의 관계를 비교적 선명히 보여준 작품은 「십자가(十字架)」인데, 자아실현의 한계 또는 불분명성은 다음과 같이 인식되고 있다.

행복한 여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예수의 희생은 인류를 구속(救贖)한다는 명백한 긍정적  가치론으로 뒷받침된 행위로서 행위의 타당성이 시인되지만, 작품에 나타난 화자는 설사 자신을 희생시킨다 하여도 부정적 세계의 힘이 소멸되지는 않으므로 희생의 행위조차도 무의미함을 자각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에서 자아실현의 시대적 한계를 젊은 시인인 윤동주는 명확히 인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의 고통은 한 젊은 지식인으로서 감당하기는 너무도 벅찬 일이었으므로, 그의 고뇌는 점점 심화되어가고 급기야는 자아의 분열현상까지도 상상적 공간에서 노정하기에 이른다. 자주 거론되는 「또 다른 고향(故鄕)」 같은  작품에서, 작품상에 제시된 존재로서의 시적 화자인 자아(自我)로서의  <나>와 견고한 신념의 화신으로서의  <백골(白骨)>로 나타난 신념의 자아와 이상세계  또는 낙원지향(樂園志向)의 자아로서의  <아름다운 혼>의 세 자아로 분화(分化)된 사실이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렴 가자
벡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이러한 진술에서 현실의 고향은 식민지 치하의 질곡에 빠진 불행의 공간으로 인식되며, 그 불행의 공간을 신념과 의지로 버티고 극복할 도덕적 견고성을 지탱하는 자아로서의 <백골>을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백골>의 수용에는 시인 윤동주의 비상한 도덕적 결단성과 결합된 견고성이 보이는 한편, 시대의 비리에 대해 과감히 도전하여 죽음조차도 불사한다는 결의까지 포함되고 있다. 그러므로 화자는 시적 자아의 내부에서 세속적 자아와 도덕적 자아, 그리고 이상 지향의 자아의 세  자아가 통합과 분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을 알려준다. 아름다운 혼(魂)이  아름다운 나라로 간다는 진술은 기독교도로서의 낙원지향의 의미공간을 설정한 것이며 그것은 기독교적인  함의를 내포한 어사로 볼 수  있다. 이는 현실에서의 실패를 종교적 차원에서라도  승화시켜 성취해야겠다는 시인의 토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혼과 아름다운 고향은  갈등과 모순과 비리가 없는 천연적(天然的)인 이상 공간이며, 바로 기독교가  설정한 이상 공간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젊은 시인의 내부에서는 부단히 현실의 비리와 모순을 극복하고 초월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으며, 그러한 노력의 지속에서 시인의  고뇌와 정직성과 성실성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부단한 노력도 실천으로써 이끌어 가는  지속의 의지나 정열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인의 정열은 밖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내심의 견고한 의지로 다스려지고 있다.
이 시인은 다른 작품 「길」에서 시적 화자의 생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풀 한 포기 업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인용된 시구에서 볼 수 있듯이, 풀 한 포기 없는  길은 생명이 부재한 황폐화된 현실을 암시한 것인데, 이러한 죽음의 세계에서 화자가 생존하고 있는 것은 다른 쪽, 즉 생명이  보장된 반대편의 가치를 지향하는 의지가 죽음의 논리를 극복한다는 함의를 보인 것이라 풀이된다. 또 가치를 상실한 자아로서  살고 있는 것은 반드시 가치를  회복하는 미래의 자아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시인은 그의 수필 「별똥 떨어진 데」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한 적이 있다.

이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켠으로 훠언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라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랑지길에서 주저 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즉 시인의 시대인식에서 밝은 전망이 보이지 않음을 볼 수 있는데, 일제 말기의 가혹한 군국주의 압제 속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의 형상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이러한 고뇌의 결정은 「간(肝)」 같은 작품에서도 적절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두운 일면과 함께 작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는 미래의 약속이 있고 또 그것은  그의 고뇌 못지 않은  정열과 통합되어 있다. 그밖에도  「사랑스런 추억」에도 그러한 밝은 미래는 젊음의 정열과 함께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그의 시상에 개인적 체험의 아름다움이 자주 나타나는데 가령 일례로서 어머니의 개념은 친어머니의  의미나 조국의 의미로 확대되고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존재적 근거지인  고향과 통합되어 있다. 이 점에서 그가 애국적인 시인임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즉  시인의 개인적 삶과 연결된 시대의 의미를 이해하며 도덕적 자아를 성숙시켜가는 노력이 그의 시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시인에게 있어 고향인식은 각별한 점이 있는  것 같다. 그의 「슬픈 족속(族屬)」을 보면, 한국인의 여인상이 간결하면서도 직재한 서술로 그 시대의  의미와 통합되어 나타나 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위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횐 색과 검은 색의 대조가 눈에 띄면서, 일제 치하 한국여성의 일반적인 삶의 양태가 간명하게 나타나 있다. 작품의 화자는 <거친 발>과 <슬픈 몸집>과 <가는 허리>를 제시하면서 중립적인 시선을 지탱하지 못하고 연민의 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평범한 듯한 삶의 한 풍속 속에서 시인은 시대의 아픔을 발견하고 있다. 짐작컨대 이러한 옷차림은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걸쳤던 우리나가 북쪽지방의 의상의 관습과  관계된 묘사라 하겠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고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한국여성의 삶의 자태가 그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을 것이며, 그 속에 숨어 있는 시대의 슬픔을 자라나면서 차츰 발견했을 것이다.
작가 이태준도 「패강냉(浿江冷)」에서  작중인물을 통하여 평안도  여성의 머릿수건에 관한 소견을 칼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고유풍속의 미감에 관한 반응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자아 내부에 가치의 일부로 자리잡은 사실에 관한 인식이라 하겠다. 그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현은 평양여자들의 머릿수건이 늘 보기 좋았다. 현은  단순하면서도 흰 호접과 같이 살아 보였고, 장미처럼 자연스런 무게로 한송이 얹힌 당기는, 그들의 악센트 명랑한  사투리와 함께 '피양내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아름다움을 제 고장에 와서도 구경하지 못하는 것은, 평양은 또 한 가지 의미에서 폐허라는 서글픔을 주는 것이었다.

- 『이태준 전집』 단편 II(106면, 서울출판사)

인용된 내용에 보이듯이, 북쪽지방의 아름다운 생활습속이  일제의 억압에 의하여 금지되는 시대의 아픔이 묘사되고 있다.
물론, 윤동주 시인은 세부묘사보다는 인상의 요체만을 부분적으로 제시하였고, 그  이면에 숨은 바 시대의 고통을 일깨우고 있다. 두 작가의 시각은 그러나 시대의 힘이 고향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훼손시키거나 제한하는 사실에 공감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하겠다.
이러한 고향인식과 전통적 삶의 인식은 사실은 우리의 문화전통이 우리의 가치를  지탱하는 기준이 되고 있음을 이해케 한다. 시인이 말하는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는 백의민족의 순수한 측면과 소박한 측면을 드러내는 말이면서 전통성을 사물로  대신하여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슬픈 몸집>과 <가는 허리> <거친 발>에서 수고하고 고난을 겪는 가녀린 여인네들의 모습이 적절히 집약되어 있다. 이 여인들은, 고향의  어머니이고, 누이이고, 또 친척들이고 이웃들인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네 줄의 시를 이루는 배경으로서 우리의 고향이 역사적 전통성과 융합되게 한 것 같다. 특히 <질끈 동이다.>에서 그 고 난을 견디고 이겨 나아가는 시적 함의가 절묘하게 담기도록 한 의장이 뛰어나다 하겠다. 이러한 시구에서 우리 고향을 고난 속에서 지켜 나아가는 여성적 의지도 어느 만큼은 드러나게 했고, 이태준의 <폐허>의식과는 그 취지가 다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 고향인식의 또 다른 측면이 보인다. 그의 「장」에는 장날의 아낙네들이 묘사되고 있는데, 생활의 고달픔이 어떤 활기와 공존함을 일깨우고 있다.

왼 하루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인용된 작품의 끝 연에 보이듯이, 여인들의 생활현장의 하나인 시끌버끌한 시장이 묘사되고 있고, 귀가 길에서 역시 생활의 고달픔이 나타나 있다. 이렇게 여인들의 삶을 관찰하고 회고하면서, 그 안에 고향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씨가 담겨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에게 있어 고향은 생존의 기틀이며 또 가치의 한 기준이 되고 있다. 어머니, 누나, 마을 사람들, 동생, 친구, 병아리, 가위, 종이, 바느질, 조개껍질…… 등등의 사물들은 고향마을과 고향집과 통합된 유소년기의 삶의 인식을 이루는 요체들이다.  즉 고향의 사물들과 시적 가치는 동질의 것임을 알게 해준다. 여기서, 시편의 의미와 주제는 시인의 경험적 사물이 상상적 질서로 통합되면서 드러나게 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소년기의 시적 맥락이, 청년기의 시대의식과  대조되면서 시대 전체와의 갈등이 내면화되면서 도덕적 자아의 대응적 확립이 이루어져간 것이라 보인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

위 시편의 몇 연에서 콜  수 있듯이, 식민지 치하의 젊은  시인으로서 세속적인 자아와 미래지향적인 나와의 융합을 적절히 나타내  보이고 있다. 여기서 이상적  가치를 지향하는 자아와 세속적 삶에 시달리는 욕망의 자아가 분리되지 않음을  보면서, 그의 도덕적 통합성이 돋보이게 된다. 인용된 가운데 연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를 명징하게 제시함으로써, 일제 치하의 그 많은 애국지사들과 광복을 열망하던 모든 민족의 염원이 시적 간결성으로 자아 내부에 깃들여져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윤동주 시인의 죽음은, 여러 풀이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의 순결하고 정직한  도덕적 확신에 의한 죽음이었다고 생각된다. 총을 들고 일제에 항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곧고 굳고 맑은 지조가 일제의 어떤 억압에도  타협하지 않았으므로 죽음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뜻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와 삶은 완전히 통합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창조적 자아로서의 화자의 말과 세속적 삶을 영위한바 세속적 자아 사이의 괴리가 「쉽게 씌어진 시」에서 사라지고 통합됨을 봄으로써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9>

 

소년(少年)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1939>

 

눈오는 지도(地圖)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그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1941.3.12>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 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 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1941.6>

 

병원(病院)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 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 곳에 찾아 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940.12>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5.10>

 

간판(看板)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흰 와사등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태초(太初)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빠알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또 태초(太初)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 소리 들려올 게외다.

<1941.5>

 

무서운 시간(時間)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1941.2.7>

 

십자가(十字架)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이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5.31>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1941.6.2>

 

슬픈 족속(族屬)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9>

 

눈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1941.5.31>

 

또 다른 고향(故鄕)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1941.9>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깊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9.31>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1941.11.5>

 

2. 쉽게 씌어진  시(詩)

 

 

초 한 대


초 한 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934.12.24>

 

내일은 없다


------ 어린 마음이 물은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偉人)들!

<1934.12.24>

 

거리에서


달밤의 거리
광풍이 휘날리는
북국의 거리
도시의 진주
전등 밑을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 몸에 둘 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회색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旋風)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 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1935.1.18>

 

창공(蒼空)


그 여름날
열정의 포플라는
오려는 창공의 푸른 젖가슴을
어루만지려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끓는 태양 그늘 좁다란 지점에서

천막같은 하늘 밑에서
떠들던 소나기
그리고 번개를,
춤추던 구름은 이끌고
남방(南方)으로 도망하고,
높다랗게 창공은 한 폭으로
가지 위에 퍼지고
둥근달과 기러기를 불러 왔다.

푸드른 어린 마음이 이상(理想)에 타고,그의 동경의 날 가을에
조락(凋落)의 눈물을 비웃다.

<1935.10.20>

 

조개 껍질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어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소리.

<1935.12>

 

참새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 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로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자 밖에는 더 못쓰는 걸.

<1936.12>

 

고향집


--- 만주에서 부른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듯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비둘기


안아보고 싶게 귀여운
산비둘기 일곱 마리
하늘 끝까지 보일 듯이 맑은 공일날 아침에벼를 거두어 빤빤한 논에
앞을 다투어 모이를 주우며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 받으오.

날씬한 두 나래로 조용한 공기를 흔들어두 마리가 나오
집에 새끼 생각이 나는 모양이오.

<1936.2.10>

 

황혼(黃昏)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쭉한 일자(一字)를 쓰고…… 지우고……까마귀떼 지붕 우으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1936.3.25>

 

이별(離別)


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
잿빛 하늘에 또 뿌연내, 그리고
크다란 기관차는 빼-액-울며,
조그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 하고 ---
더운 손의 맛과 구슬눈물이 마르기 전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모단봉(牡丹峰)에서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끌어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女兒)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로
재잘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1936.3.24>

 

가슴1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두다려보오.

그래 봐도
후---
가아는 한숨보다 못하오.

<1936.3.25>

 

가슴2


불 꺼진 화(火)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1936.7.24>

 

종달새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랑한 봄하늘,
가벼운 두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늘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길로
고기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1936.3>

 



한 간(間) 계사(鷄舍) 그 너머 창공이 깃들어자유의 향토를 잊은 닭들이
시들은 생활을 주잘대고
생산의 고로(苦勞)를 부르짖었다.

음산한 계사에서 쏠려나온
외래종 레구홍,
학원에서 새 무리가 밀려나오는
삼월의 맑은 오후도 있다.

닭들은 녹아드는 두엄을 파기에
아담한 두 다리가 분주하고
굶주렸든 주두리가 바지런하다.
두 눈이 붉게 여물도록------

<1936.봄>

 

산상(山上)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
산 위에까지 왔다.
아직쯤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버려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이
함석지붕에만 비치고,
굼벵이 걸음을 하는 기차가
정거장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하고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더 높은 데로 올라가고 싶다.

<1936.5>

 

오후(午後)의 구장(球場)


늦은 봄, 기다리던 토요일날
오후 세시 반의 경성행 열차는
석탄 연기를 자욱히 품기고
지나가고

한몸을 끄을기에 강하던
공이 자력을 잃고
한 모금의 물이
불붙는 목을 축이기에
넉넉하다.
젊은 가슴의 피 순환이 잦고,
두 철각(鐵脚)이 늘어진다.

검은 기차 연기와 함께
푸른 산이
아지랑이 저쪽으로
가라앉는다.

 

산림(山林)


시계가 자근자근 가슴을 따려
불안한 마음을 산림이 부른다.

천년 오래인 연륜에 짜들은 유암(幽暗)한 산림이,고달픈 한 몸을 포옹(抱擁)할 인연을 가졌나보다.

산림의 검은 파동 우으로부터
어둠은 어린 가슴을 짓밟고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솨--- 공포에 떨게 한다.

멀리 첫여름의 개고리 재질댐에
흘러간 마을의 과거는 아질타.

나무 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

<1936.6.26>

 

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1936.12. 또는 37.1.추정>

 

양지(陽地)쪽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호인(胡人)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벽을 등진 섧은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 둘이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恨)함이여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1936.6.26>

 

꿈은 깨어지고


꿈은 눈을 떴다
그윽한 유무(幽霧)에서.

노래하는 종다리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날 봄타령하던
금잔디밭은 아니다.

탑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탑이 ---

손톱으로 새긴 대리석탑이 ---
하루 저녁 폭풍에 여지없이도,

오오 황폐의 쑥밭,
눈물과 목메임이여!


꿈은 깨어졌다.
탑은 무너졌다.

 

곡간(谷間)


산들이 두 줄로 줄달음질치고
여울이 소리쳐 목이 잦았다.
한여름의 햇님이 구름을 타고
이 골짜기를 빠르게도 건너려 한다.

산등허리에 송아지뿔처럼
울뚝불뚝히 어린 바위가 솟고,
얼룩소의 보드라운 털이
산등성이에 퍼-렇게 자랐다.

3년만에 고향에 찾아드는
산골 나그네의 발걸음이
타박타박 땅을 고눈다.
벌거숭이 두루미 다리같이……


헌신짝이 지팡이 끝에
모가지를 매달아 늘어지고,
까치가 새끼의 날발을 태우며 날 뿐,골짝은 나그네의 마음처럼 고요하다.

<1936.여름>

 

햇비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보고 웃는다.

하늘다리 놓였다
알롱알롱 무지개
노래하자 즐겁게
동무들아 이리 오나
다 같이 춤을 추자
햇님이 웃는다
즐거워 웃는다.

<1936.9.9>

 

빗자루


요오리조리 베면 저고리 되고
이이렇게 베면 큰 총 되지.
누나하고 나하고
가위로 종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빗자루 들고
누나 하나 나 하나
엉덩이를 때렸소
방바닥이 어지럽다고------

아아니 아니
고놈의 빗자루가
방바닥 쓸기 싫으니
그랬지 그랬어
괘씸하여 벽장 속에 감췄더니
이튿날 아침 빗자루가 없다고
어머니가 야단이지요.

<1936.9.9>

 

비행기


머리에 푸로펠러가
연잣간 풍차보다
더-빨리 돈다.

땅에서 오를 때보다
하늘에 높이 떠서는 빠르지 못하다숨결이 찬 모양이야.

비행기는 ------
새처럼 나래를
펄럭거리지 못한다
그리고 늘 ------
소리를 지른다.
숨이 찬가봐.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굴뚝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1936.가을>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히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1936.12>

 

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 걸.

어머니
내가 쓰다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천 위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라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 걸.

<1936.12.초>

 

오줌싸개 지도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벌러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1936.초>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1936.12.추정>

 

기왓장 내외


비오는날 저녁에 기왓장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웁니다.

대궐지붕 위에서 기왓장내외
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1936. 초 추정>

 

황혼(黃昏)이 바다가 되어


하루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 감기고……

저- 웬 검은 고기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고.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西窓)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의 설움.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딩구오…… 딩구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 게오.

<1937.1>

 



외양간 당나귀
아-ㅇ 외마디 울음 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아 애기 소스라쳐 깨고,

등잔에 불을 다오.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 키 담아 주고,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 모금 먹이고,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드오.

<1937.3>

 

달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여윈 나무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거(伴倨)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누가 있어만 싶은 묘지엔 아무도 없고,정적(靜寂)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이 폭 젖었다.

<1937.4.15>

 

풍경(風景)


봄바람을 등진 초록빛 바다
쏟아질 듯 쏟아질 듯 위태롭다.

잔주름 치마폭의 두둥실거리는 물결은,오스라질듯 한껏 경쾌롭다.

마스트 끝에 붉은 깃발이
여인의 머리칼처럼 나부낀다.

*

이 생생한 풍경을 앞세우며 뒤세우며외 하루 거닐고 싶다.

------ 우중충한 오월 하늘 아래로,------ 바닷빛 포기포기에 수놓은 언덕으로.

<1937.5.29>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버려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제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왼 하루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1937.봄>

 

그 여자(女子)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갔습니다.

 

한난계(寒暖計)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모가지를 비틀어 맨 한난계,
문득 들여다 볼 수 있는  운명한 오척육촌(五尺六寸)의 허리 가는 수은주,
마음은 유리관보다 맑소이다.

혈관이 단조로워 신경질인 여론동물(與論動物),가끔 분수(噴水)같은 냉(冷)침을 억지로 삼키기에정력을 낭비합니다.

영하(零下)로 손가락질 할 수돌네 방처럼  치운 겨울보다
해바라기 만발한 팔월(八月)  교정이 이상(理想)곺소이다.
피끓을 그날이------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세올시다.
동저고리 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려---이렇게 가만 가만 혼자서 귓속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마도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역사 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봅니다.

<1937.7.1>

 

소낙비


번개, 뇌성, 왁자지근 두다려
머언 도회지에 낙뢰가 있어만 싶다.

벼룻짱 엎어논 하늘로
살 같은 비가 살처럼 쏟아진다.

손바닥만한 나의 정원이
마음같이 흐린 호수 되기 일쑤다.

바람이 팽이처럼 돈다.
나무가 머리를 이루 잡지 못한다.

내 경건(敬虔)한 마음을 모셔드려
노아 때 하늘을 한 모금 마시다.

<1937.8.9>

 

비애(悲哀)


호젓한 세기의 달을 따라
알듯 모들 듯한 데로 거닐고자!

아닌 밤중에 튀기듯이
잠자리를 뛰쳐
끝없는 광야를 홀로 거니는
사람의 심사는 외로우려니

아 --- 이 젊은이는
피라밋처럼 슬프구나.

 

명상(瞑想)


가츨가츨한 머리칼은 오막살이 처마끝,쉬파람에 콧마루가 서운한 양 간질키오.

들창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 밤에 연정은 어둠처럼 골골이 스며드오.

<1937.8.20>

 

바다


실어다 뿌리는
바람처럼 시원타.

솔나무 가지마다 새침히
고개를 돌리어 삐들어지고,

밀치고
밀치운다.

이랑을 넘는 물결은
폭포처럼 피어오른다.

해변에 아이들이 모인다.
찰찰 손을 씻고 구보로.

바다는 자꾸 설워진다.
갈매기의 노래에……

돌아다 보고 돌아다 보고
돌아가는 오늘의 바다여!

<1937.9>

 

산협(山峽)의 오후(午後)


내 노래는 오히려
설운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오후의 명상(暝想)은
아- 졸려.

<1937.9>

 

비로봉(毘盧峰)


만상(萬象)을
굽어 보기란------

무릎이
오들오들 떨린다.

백화(白樺)
어려서 늙었다.

새가
나비가 된다.

정말 구름이
비가 된다.

옷자락이
춥다.

<1937.9>

 

창(窓)


쉬는 시간마다
나는 창녘으로 갑니다.

------창은 산 가르침.

이글이글 불을 피워 주소.
이 방에 찬 것이 서립니다.

단풍잎 하나
맴도나 보니
아마도 자그마한 선풍(旋風)이 인 게외다.

그래도 싸늘한 유리창에
햇살이 쨍쨍한 무렵,
상학종(上學鐘)이 울어만 싶습니다.

<1937.10>

 

유언(遺言)


후어-ㄴ 한 방에
유언은 소리 없는 입놀림.

------ 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이밤에사 돌아오나 내다 봐라------
평생 외롭던 아버지의 운명(殞命)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 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1937.10.24>

 

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거짓부리


똑, 똑, 똑,
문 좀 열어 주세요
하룻밤 자고 갑시다
밤은 깊고 날은 추운데
거 누굴까?
문 열어 주고 보니
검둥이의 꼬리가
거짓부리 한걸.

꼬기요, 꼬기요,
달걀 낳았다.
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
간난이 뛰어가 보니
달걀은 무슨 달걀,
고놈의 암탉이
대낮에 새빨간
거짓부리 한걸.

<1937.>

 

산울림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비오는 밤


솨- 철석!  파도소리 문살에 부서져잠 살포시 꿈이 흩어진다.

잠은 한낱 검은 고래떼처럼 살래어,달랠 아무런 재주도 없다.

불을 밝혀 잠옷을 정성스레 여미는삼경(三更).
염원.

동경의 땅 강남(江南)에 또 홍수질 것만 싶어,바다의 향수보다 더 호젓해진다.

<1938.6.11>

 

이적(異蹟)


밭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 바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 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 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어온 것은
참말 이적(異蹟)이외다.

오늘 따라
연정(戀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이것들이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餘念)없이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1938.6.19>

 

사랑의 전당(殿堂)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殿)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古風)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내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클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었다.

성스런 촛대에 열(熱)한 불이 꺼지기 전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 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내게는 험준한 산맥이 있다.

<1938.6.19>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1938.9.15>

 

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고추밭


시들은 잎새 속에서
고 빠알간 살을 드러내놓고,
고추는 방년(芳年)된 아가씬 양
땡볕에 자꾸 익어간다.

할머니는 바구니를 들고
밭머리에서 어정거리고
손가락 너어는 아이는
할머니 뒤만 따른다.

 

햇빛·바람


손가락에 침 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1938.추정>

 

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울어서
댓글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더민주당 논산 시의회 9대 의회 후반기 의장 후보 조배식 의원 내정 더불어민주당  논,계,금  당협은 15일  저녁  7인의  당 소속  시의회 의원[ 서원, 서승필 ,조용훈.윤금숙 ,민병춘 ,김종욱 조배식 ]을 긴급 소집  오는 28일로 예정된  논산시의회  후반기  의장  내천자로  재선의원인  조배식 [광석]  의원을  결정  한것으로  알려졌다.  더...
  2. 논산시의회 9대 후반기 의장 놓고 민주당 민병춘 .조배식 ,조용훈 3파전 ,, 국힘 이상구 표 계산 중 " 오는  6월 28일 실시하는  논산시의회  9대  후반기  의장 선출을  둘러싸고    다수당인  민주당  내 후보단일화를  위한  물밑 작업이  치열하다. 9대 의회  후반기  의장 출마를  선언한  민병춘  조배식 조용훈  세의원이    15일로 예정된    단일 후보  ...
  3. 기자수첩 ]논산시 추락하는덴 날개가 있었다. 시장[市長]과 선량[選良]의 불화 끝내야 한다 . 제22대 총선이 끝났다, 원구성도  끝났다, 각 지역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은  소속한 정당의  같고 다름과는 상관없이  지역구 안의  지방자치단체장들과  머리를 맞대고  출신지역구의 내년도  사업예산 확보를 위해  사활을 건  로비전에  들어간지  오래다. 여늬  지역구  국...
  4. 전철수 전 취암동장 논산농협 사외이사 당선 , 대의원 선거인 85% 지지 얻어 눈길 지난  6월  10일 실시한 논산농업협동조합  임원 선거에서  윤판수 현 조합장이  추천한  전철수[63] 전 취암동장이  대의원 105명이  참여한 신임 투표에서  선거인의  85%에  달하는 87표 를 얻어 논산농협 사외이사로 당선 되는  영광을 안았다. 논산시 내동  [먹골]  출신으로  청빈한&nbs...
  5. 임연만 사무국장 올해 충남 장애인 체전 중위권 진입에 전력투구 [全力投球]! 지난  6월 1일자로 논산시  장애인체육회 [회장  백성현 논산시장 ]  사무국장으로  전격 발탁된  임연만  [66]사무국장 ,  더  젊었던  시절부터  활발한  체육분야  활동을 통해  체육행정 및  현장 분위기를  익혀온  터여서  두달 남짓  앞으로 다가온  충남도&nbs...
  6. “논산시, 미래세대와 함께하는 6.25 전쟁 기념 및 선양행사 눈길 “논산시, 미래세대와 함께하는 6.25 전쟁 기념 및 선양행사 - 일상 속 살아있는 보훈, 미래세대와 참전유공자 교감의 장 마련 - 논산시(시장 백성현)는 25일 오후 논산대건고등학교 대강당(마리아홀)에서 6.25 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호국영령과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 제74주년 6.25 전쟁 기념식과 선양행사...
  7. 논산시 7월 1일자 2024년 하반기 정기인사 – 전보 등) 논산시 인사발령 (2024년 하반기 정기인사 – 전보 등) 7月 1日자◇전보(4급)△농산경제국장 김영민(승진) △건설미래국장 김봉순(승진) △보건소장 김배현(승진) ◇전보(5급)△ 홍보협력실장 김병호 △자치행정과장 김영기 △안전총괄과장 김무중 △100세행복과장 성은미 △회계과장 엄해경 △민원과장 성경옥(승진) △농촌활력과장 허영...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