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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이 보증되지 않는 휴게소 노점상 물품, 최대 피해자는 바로 고객 여러분입니다’-한국 도로공사
언제부터인가 고속도로 휴게소 중앙에는 이런 문구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간판 바로 앞에 있는 트럭 노점상을 겨냥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예외 없이 각종 차량용 편의용품과 등산 낚시도구 등을 가득 실은 트럭 한두 대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것도 휴게소 건물 앞 한가운데 장애인 주차장에. 팬, 벨트, 장갑, 모자 같은 요긴한 물건도 있지만 날이 시퍼런 칼과 도끼도 늘어놓았습니다. 어떤 곳은 노래를 요란하게 틀어 놓아 귀청이 얼얼할 지경입니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승객이라면 누구나 그런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게 마련입니다. 40년이 된 우리 고속도는 그동안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시설도 좋아졌고 특히 화장실은 세계적인 수준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트럭 노점상만은 손을 못 대고 있습니다. 들리는 말대로 폭력조직의 힘에 밀려 치외법권 지대로 방치하고 있다면 공권력의 존재가 의심스럽습니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지녔다는 KTX 열차를 타 보면 그 속도감과 쾌적함에 세상 많이 달라졌구나하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러나 평택 부근부터 서울까지 철로변은 후진국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철공소 폐차장 폐지퇴적장 판잣집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어 6.25 전쟁의 잔해를 보는 기분입니다.
곳곳에 가림막이 쳐져 있어 더 황폐한 모습들은 볼 수 없지만 차창 밖을 내다 볼 기분이 아닙니다. 가림막조차 낡거나 부서져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 안쪽엔 역무원들이 가꾸는 상추 고추밭이 볼품없이 흩어져 있고 빨랫줄에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 눈에 거슬립니다.
전쟁이 난 지 60년이 되었습니다. 도심에는 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지하철이 얽혀 있고 네온 사인이 번쩍거리지만 서울로 들어서는 철로 주변은 하나같이 초라한 광경입니다. 옛 서울의 관문인 숭례문까지 소실된 지경이지만, 그토록 오래 서울길을 너절하게 방치한 행정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길은 나라의 동맥입니다. 길이 뚫리면 사람의 내왕이 늘어나고, 물자가 대량으로 유통되며,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집니다. 2천여 년 전 건설된 로마의 가도가 그 전형입니다. 로마인은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500년 동안 간선도로만 8만 km, 지선도로까지 무려 1만 5천 km를 건설했습니다.
로마인들은 길을 여는 데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가도를 보수하는 한편 역참을 만들어 전령을 통한 통신과 우편물 교환 등 기반시설(infra structure)을 구축 활용했습니다. 그 시절 테베레강에 놓은 11개의 석교 가운데 5개, 제국 전역에 남은 300개가 넘는 다리를 오늘날에도 사람과 자동차가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시공하고 관리했나 짐작이 갑니다.
로마 가도 건설이 시작된 기원전 3세기에는 지구의 동쪽에서도 대규모 토목사업이 시작됐습니다.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장성은 16세기 명나라 시대까지 5천 km에 이르는 거대 축조물입니다. 한 쪽은 사람의 왕래를 촉진하는 도로를 만드는데, 다른 한 쪽은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는 방벽을 쌓았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길을 잘 닦고 유지하는 나라가 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된다는 사실은 새삼 설명한 필요도 없습니다. 60년대 부산을 방문한 대통령이 지나가는 길가에 시장이 생나무를 급히 옮겨 심어 환심을 얻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서울시장과 장관까지 영달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대통령과 국민을 속이는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프라는 하드웨어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도록 운용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실용이자 실사구시입니다. 국민을 선동 호도하려는 입은 닫고, 눈을 크게 뜨면 길을 길답게 하는 길이 보일 것입니다.
필자소개
김홍묵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에 몸담았다. 이후 (주)청구 상무이사,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주)화진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언론사 정부기관 기업체 등을 거치는 동안 사회병리 현상과 복지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사와 기고문을 써왔으며 저서로는 한국인의 악습과 사회구조적 문제를 다룬 '한국인 진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