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년 인력은 노는 인력인가요?
저에게 첫 ‘이모 할머니’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큰언니의 외손자가 지난 달 돌을 맞았습니다. 제 항렬을 기준으로 친정 쪽으로는 첫 손자이니 귀여움을 독차지 하는 거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꼬맹이는 직장 다니는 제 엄마 대신 외할머니 손에서 크기 때문에 아이들이 다 떠나고 어른들만 덩그러니 남아있던 집에 재롱둥이 노릇을 톡톡히 합니다.
제 조카의 신혼집은 친정과 자동차로 약 15분 거리라 출근하면서 아이를 맡기고, 퇴근할 때 데려가곤 했는데 요즘은 그것조차 번거롭고 고단해서 퇴근길에 잠깐 들러 얼굴만 보고, 아예 주말에만 데려 간다고 합니다.
한국의 직장 문화가 기혼여성이라해서 사정 봐주는 법이 없으니 젖먹이 엄마라한들 야근에서 빼주는 경우도 없다고 합니다. 그렇듯 밤늦게 퇴근하는 것이 다반사인데 그 시간에 공연히 자는 애를 깨워서 집에 데려가는 수선을 피울 건 뭐며, 직장에서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어미를, 중간중간 깨는 어린 것 땜에 잠도 못자게 해서야 되겠냐는 외할머니의 배려 덕택입니다.
그나마 애 맡길 데가 없어 아빠와 엄마,그리고 어린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육아 별거’를 면한 것만도 다행인지 모릅니다.
외손자를 돌보기 시작한 이래 제 언니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결혼생활 30년 만에 처음으로 집안 일을 돕는 아주머니를 청하고, 집앞 은행 볼 일이나 우체국 가는 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저하고 어쩌다 전화통화를 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해서 이야기하다 말고 애가 깼다면서 그만 끊자고 합니다. 한마디로 꼼짝달싹 못하고 밤낮 손자한테 시달리다보니 언니는 살도 많이 내렸답니다.
기운이 달려 감기 몸살이라도 날라치면 아기에게 옮길세라, 게다가 앓아누울 처지도 아닌지라 약을 먹든지 주사를 맞든지 가급적 빨리 떨치고 일어날 궁리를 한다니, 조카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꼬맹이를 보느라 제 언니가 너무 힘든 것이 저는 속상합니다.
이렇게 자기 생활을 전부 포기하고 손자 보기를 자청할 때는 언제고 언니는 전에 없던 ‘내 탓’ 이라는 말버릇이 생겼습니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래, 비싸게 유학하고 힘들게 직장 가진 거, 애 키운다고 포기하게 할 수 없어서 내가 대신 맡아준다고 한 거니까. 떠오르는 태양에게 지는 태양이 양보하는 건 당연하잖아.”
자식에 대한 자기 욕심이 과해서 고생을 사서 한다며 ‘내 탓 ‘운운하는 것입니다.
제가 있는 호주에서 대학을 나온 큰 조카 뿐 아니라 밑의 두 조카도 자기 일이 있으니 ‘욕심 많은’ 제 언니가 나중에 걔들 애들도 최소 하나씩은 봐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기사 하나 앞에 두 명씩, 여섯은 봐줄테니 걱정말라며 애들한테 이미 약조를 했다고 하네요.
사정이 이렇지만 위로한답시고 어디다 맡길 일이지 뭣땜에 그 고생이냐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돈은 둘째고 믿고 맡길 마땅한 곳을 찾기가 어디 쉬운가요.
그렇다고 지새끼 지가 키우게 애 어미를 집에 들여앉히라는 말도 쉽게 할 소리는 아닙니다.
호주에서 고생고생 공부한 것 ‘지 알고 내 알거늘’, 그러기에는 여태껏 배운 것이 너무 아깝습니다. 애 다 키우고 나중에 오라고 직장에서 자리 지켜주지 않는 다음에야 한 번 그만두면 그 길로 그만이니까요.
언니도 언니지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조카도 딱하고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이던 차에 최근 호주에서 나온 한 연구 결과가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조부모 손에서 크는 아이들이 정서적인 면 뿐 아니라 신체적, 지적, 사회적 성숙도를 포함한 모든 측면에서 부모가 혼자 돌본 경우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내용입니다. 즉 조부모의 영향력이 아동의 전인적 성장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 (critical role)을 한다는 것입니다.
호주 가정 연구소가 국내 최대 규모로 1만 명의 아동들(유아 5,000명, 4~5세 5,000명)을 대상으로 장장 7년에 걸쳐 장기 추적 연구한 결과라고 하니 믿을 만하게 들립니다.
호주 정부는 이같은 결과를 미래의 차일드 케어 정책 입안의 주요 지표로 삼을 것이라고 하는데, 머지않아 제도적, 정책적으로 아기 돌보기에 ‘노는 인력’이 ‘노년 인력’으로 활용될 것으로 해석됩니다.
한국도 요즘 ‘젊은 노인’, 일하고 싶은 노년층이 많은 줄 압니다. 은퇴 후의 소일거리와 여가활용, 용돈벌이 등으로 삶의 활기와 의미를 되찾고 싶은 그 분들에게 우리 사회의 미래인 2세들을 돌보아 주십사 부탁드리면 어떨까요.
시간과 체력이 허용하는 한에서 육아시설에 일자리를 마련해 드린다면 십시일반식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고, 노년의 여생도 보람되지 않을까요.
연륜깊고 지혜로운 어르신들이 기꺼이 ‘내 아이의 조부모’가 되어 주셔서 우리의 2세들을 건강하고 총명하게 키워주시지 않겠습니까.
필자소개
신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