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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해임은 끝이 아니다
정연주 씨가 한국방송공사 사장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미디어 권력자’가 새로이 선출된 정치 권력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정 씨는 직원들에게 "오로지 방송 독립을 위한 선한 싸움에 모두가 단결된 모습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면서 "공영방송 KBS를 지키는 일에 저의 존재와 이를 둘러싼 문제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 씨는 감사원이 그의 해임을 요구하자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통해서 “KBS 사장의 거취는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영방송의 독립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개인적으로 이 자리, 연연하지 않는다. 훌훌 털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 자리를 지켜온 이유는 공영방송의 독립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감사원과 한국방송공사 이사회가 정연주 사장의 해임 사유로 적시한 것은 누적된 적자 등의 방만한 경영과 편파 방송 등이었습니다. 필자는 방만한 경영에 대해 그의 책임을 묻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알다시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가장 존경한다는 언론인으로서 ‘盧의 코드’에 맞아 임명되었으나 방송엔 문외한인 신문기자 출신이었으니 방송사업을 잘할 리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당연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하자(瑕疵)는 편파 왜곡 방송일 것입니다. 2004년 6월 언론학회 보고서는 KBS에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관련 방송보도는 편파 보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감사였던 강동순 씨는 2006년 탄핵관련 보도는 9대.1의 비율로 탄핵 반대 쪽으로 기우는 편향 방송을 했다고 개탄했습니다. 정연주 씨가 지키고자 한 공영방송 독립이 이런 꼴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자칭 ‘국민의 방송’이라고 앵무새처럼 말하는 한국방송공사 사장이 언론보도의 생명인 공정성을 이렇게까지 태연하게 훼손한 데는 권력과 닿아 있었건 알아서 기었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물러날 때까지 모두 5년3개월간 사장으로 재임한 정 씨는 첫 임기 3년을 끝낸 뒤와 마찬가지로 “지난 5년은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죠. 많은 국민들은 정 씨가 왜 행복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모를 것입니다. 나도 모릅니다. 영국의 BBC나 일본의 NHK에 비교할 때 한국방송공사 사장 자리는 ‘신의 직장’의 최고봉인데다 시청료와 광고료라는 이중 수입구조로 땅 짚고 헤엄치는 자리라서 너무 편해 행복한 자리였나요?. 한국방송공사는 국영기업이라는 지위를 망각하고 유관 단체로부터의 경영정보 공개요구까지 거부하다가 대법원에서 패소하기도 했습니다.
한국방송공사 이사회가 정 씨를 사장직에서 해임토록 결의한 날 이에 항의하는 일부 민간 조직들의 시위 플래카드에는 “KBS이사회는 정권의 개”라는 글귀가 보였습니다. 과연 ‘정권의 개’가 누구인지 많은 국민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을 것입니다. 정연주 씨가 사장으로 앉아 있던 동안 한국방송공사는 ‘권력의 나팔수’, ‘선동 기관’, ‘괴물 국민 방송’이라는 지탄을 받았습니다. 아침이고 밤이고 쏟아졌던 불륜 드라마의 당의정 속에는 ‘편향성’이라는 야수가 숨어 있었던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요?
마침 야당이 한국방송공사 사장 해임과 체포 등 최근의 언론 상황에 대하여 언론탄압이라며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잘 됐습니다. 차제에 지난 노무현 정권을 포함하여 현재의 방송언론 실상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방송관련 국정조사를 실시하는 것이 어떨까요. ‘잘려서 물러가는’ 정연주 전 사장도 할 말이 많겠지요. 탄핵 편파방송에서부터 낙하산 임명까지, 최근의 조치가 정권의 방송 장악인지, 아니면 마지막 보루를 지키려는 좌파의 몸부림인지 석 달이 걸리건 한 해가 걸리건 3년이 걸리건 방송 간부와 언론학계, 정치인들이 망라되어 심도 있게 토론을 해봅시다.
거기서 공영방송 발전을 위한 본질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필요하다면 ‘민주주의 방송을 위한 특별법’이라도 만들어 방송을 통해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자들을 처벌합시다. 서울시 교육감도 400억원을 들여 시민 직선으로 선출하는데 정연주 전 사장이 자신의 업적인양 자랑한 대로 미디어 영향력 1위인 한국방송공사의 사장을 국민들이 직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렇게 해서 정치권력의 임명에 따른 논란을 끝장내고 선출직의 정통성을 부여하여 바람직한 공영방송의 앞날을 설계해 봅시다.
역사는 과거의 과오를 딛고 전진한다고 합니다. 그런 치열한 토론으로 과오가 있다면 숙정작업을 실시해야 정치 권력에 기생하여 단물을 빨던 어용 언론이 사라지고 우리나라의 방송 민주화도 한 단계 더 성숙해간다고 봅니다.
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 각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의 개량을 지고의 가치로 삼아 보도기사와 칼럼을 써왔다. 그는 동구권의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을 역임했으며 신문사 웹사이트 구축과 운영에서 체득한 뉴미디어 분야에서 일가견이 있다. 저서로는 병인양요 시대를 그린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