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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秦始皇)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진(秦)나라 임금으로 드넓은 중국 땅을 최초로 통일한 패자(覇者).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전 중국은 수백년 동안 무척 어지러웠습니다. 저 유명한 ‘춘추전국시대’라는 기나긴 혼란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깨끗이 정리하고 시끄러움을 잠재웠기에 그의 패권은 한층 더 빛이 났을 것입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던가. 진시황에게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교직(交織)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통일국가로 자리잡기 위한 각종 제도의 정비, 문자와 화폐, 도량형의 통일, 법치주의의 확립 등이 돋보이는 반면 수많은 백성을 희생시킨 만리장성, 아방궁, 지하무덤의 건립은 잘못된 것으로 평가되며 분서갱유(焚書坑儒)는 폭정의 극치였습니다.
흥미있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우리의 땅 조선에 보내 불로초와 불사약을 구해오게 했던 것입니다. 2천2백여년 전의 일입니다.
단군조선과 기자(箕子)조선을 거쳐 이 땅에는 위만(衛滿)조선이 막 생길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진시황의 명을 받아 수백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조선을 찾아온 선단의 책임자가 서복(徐福)이라는 사람이고, 그들이 산동성 롱커우(龍口)를 떠나 도착한 곳이 바로 제주도였습니다. 정확하게는 제주시 동쪽 조천항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서복은 제주도을 샅샅이 뒤져 불로초라고 판단되는 영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약초를 가지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고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전설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서귀포에 가서 보면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살아납니다. 우선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에 서복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묻어 있습니다. 서귀포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주도의 정남방(正南方)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귀포(南歸浦)’ 쯤으로 작명되었어야 옳았겠지요. 그럼에도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西歸浦]’라고 되어 있습니다. 서복 일행이 서쪽(중국)으로 돌아갔다는 데서 유래된 것입니다.(한중친선협회보 제2호 3쪽)
또 하나는 추사 김정희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보통 추사(秋史)를 명필가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에 능한 학자였습니다. ‘금석학’은 금속으로 된 그릇이나 비석 등의 명문(銘文)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추사가 물론 글씨를 잘 쓰는 명필이었음에는 틀림없으나 이 금석학 분야에서는 조선조 5백년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만한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발견, 고증한 업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아까운 인재 추사는 1840년 헌종 6년 9월 윤상도(尹尙度)라는 이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제주도[大靜縣]에 유배됩니다. 귀양살이하던 중 저 옛날 서복이 서귀포의 정방폭포 벽에 남겼다는 ‘徐福過之[서복이 다녀간 곳]’라는 희미한 글을 고증했다 합니다.
이래서 서귀포의 정방폭포 근처에는 ‘서복 기념관’이 있습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풍광이 수려한 5천여평의 대지 위에 깔끔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2천2백년도 더 되는 오랜 역사의 배경을 안고 있기 때문에 이 기념관도 오래되었을 법합니다. 아울러 제주도, 특히 서귀포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유명짜하게 자리매김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명이나 관광지가 놀랄 만큼 자세하게 취급되어 있는 성지문화사 발행(2006년 1월)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동행인 태권도신문의 김창완 국장도 서귀포 출신이지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 기념관이 문을 연 지 3년 밖에 안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랬습니다. 서복의 발자취가 실로 긴 세월 뒤에 서귀포에 기념관으로 되살아나기까지에는 제주도와 서귀포시 당국의 노력이 물론 기본이 되었지만 진짜 숨은 공로자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지난 80년대 중반 체육부와 통일부 장관을 지냈고 지금은 한·중친선협회를 이끌고 있는 이세기(李世基)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지난해 8월 16일자 중국의 인민일보는 “이세기, 한국 ‘최고의 중국통’”이라는 제목으로 특집기사를 실은 바 있거니와 중국을 잘 아는 이 회장은 십수년 전부터 ‘서복 기념관’을 건립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차근차근 일을 추진해 나간 것입니다.
필자소개
최창신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다.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태권도신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