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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法隆寺)에서 <하>
호류지(法隆寺)는 자랑스러웠습니다. 한국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백제는 호류지에서 온유하고 장중하며 완벽에 가까운 자세로 찬란한 백제관음상, 석가삼존상, 약사여래상과 함께 고즈넉한 여유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고대 한국양식을 완벽하게 드러내고 서 있는 호류지의 건물들, 즉 정문인 남대문, 금당 요사채등의 문 위에는 일본적인 것을 상징하는 문양의 노렌(暖廉ㆍ가게 문 앞에 내거는 상호가 적힌 천)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전에 장식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세계문화유산은 오리지널을 벗어난 어떤 장식을 첨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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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렌은 일본의 가마쿠라(鎌倉), 무로마치(室町)시대부터 민간의 집안 장식에 쓰여 온 소품입니다. 휘장이나 커튼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공간과 공간 사이의 작은 칸막이로 쓰였던 소도구입니다. 작은 공간에서 바람막이나 프라이버시 보호용으로 쓰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점 발전해 레스토랑이나 상점 등의 문 앞에 이용되었고 여기에 자기 상호의 고유한 문양을 넣어 그 상점의 자존심으로서의 심벌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광고 기능도 고려했으며, 특히 상점에서는 노렌을 걸거나 거두어들임에 따라 영업시간인지 아닌지를 손님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후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영주들이나 무사가문에서는 가문의 영광을 나타내는 문양의 노렌을 만들었고, 전쟁에 나갈 때 문양의 깃발을 휘날리며 싸움터로 출정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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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호류지 방문 후, 다음날 두 번째 방문을 했습니다. 백제 관음상이 있었던 관람실의 마지막 출구 전시실에 진열된 몇 장의 사진이 기억 속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평생 처음으로 전시관의 규칙을 어기고 사진을 찍기로 했습니다. 촬영금지 구역이어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사진을 꼭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관람객이 줄어들고 경비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은 대략 80년 전 호류지의 보수 전 원래 모습과 보수 후 약간 변한 모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원래 모습에서는 호류지에 노렌이 걸려 있지 않았고 메이지(明治)유신 이후로 추정되는 보수 후부터 노렌을 건물에 건 모습이 사진에 보입니다. 왜 엄연히 백제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고 건축물이자 사찰에 이런 노렌을 달아매야 하는지, 더욱이 유명한 교토(京都)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 킨카쿠지(金閣寺), 긴가쿠지(銀閣寺)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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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인의 정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이 그들에게 이런 세계문화유산에까지도 노렌을 달아 모든 지구인들에게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를 보이려 하는가.
근본적으로 백제국의 흔적, 백제인, 즉 한국인을 지우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의 몸부림이 이 호류지의 노렌을 통하여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아름다운 호류지에 일본의 심벌 마크인 노렌을 달아서라도 여기는 일본이다, 이것은 일본인 것이다 라고 자부해야만 합니다.
한국인의 손으로 전수된 학문과 문화가 자랑스런 천황의 후손이라 생각하는 일본인들에게 치욕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피가 엄연히 한국인의 피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야마토(倭)국에 살고 있던 토착민이나 왕궁의 실력자는 거의 백제인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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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은 쓸모없지만 AD 600년 후반 그 무렵, 만약 사이메이(齊明) 천황이 백제 원군 5만명을 파병하려 후쿠오카(福岡)로 임시 천도를 계획하고 떠날 때, 그녀의 큰아들이 사랑하던 동생의 부인을 포기했다면, 또한 그 출정에 동반만 하지 않았던들 동생은 형이 백제인들을 이끌고 천도했던 비와(琵琶)호 근처 오츠(大津)의 궁을 파괴하는 쿠데타를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동생 덴무(天武) 천황은 그 이후 백제의 모든 흔적을 가능하면 지우려 했고 일본 역사서 日本書紀의 많은 조작을 명령했던 것으로 후세의 사가들이 추측하고 있다 합니다. 형제 사이에 사랑싸움이 없었다면 형인 덴지(天智) 천황이 이끌었던 백제국의 후손들은 아스카(飛鳥) 문화를 찬란히 꽃피우며 오늘날 일본 주류의 한국인으로 자랑스럽게 살아 왔을 것입니다.
여인에 대한 사랑은 세계 역사를 뒤바꾸는 힘이 있는 듯 합니다. 절세미인, 궁정가인이었던 백제인 2세 누가다 노 오기미(額田王) 때문에 불붙은 형제천황들의 싸움으로, 세계에 유례가 없을 만큼 똑같은 얼굴에 비슷한 언어를 쓰는 오늘의 일본과 한국은 첨예한 대립과 증오와 부정 질투로 화해하지 못하는 두 국가가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긴테츠 열차 안에서 자꾸 호류지의 노렌이 마치 백제인의 한을 부르는 듯, 우리 민속무 살풀이의 긴 수건자락이 휘휘 온몸을 돌아 흐르듯이 어른거렸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줄줄 흐르는지 아무도 보지 않게 차창으로 향한 얼굴을 쉴 새 없이 닦았습니다.
왜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매사를 은폐하려고만 하는 일본인들,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부정하고자 하는 그들의 몸부림이 처연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오랜 해외생활의 떠돌이인 내가 그들, 고향 잃고 성조차 바꾸어 자신들의 뿌리를 버리고 사는 백제의 후손 일본인들의 숙명을 닮았다고도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에서 흘린 최초의 눈물이었습니다. ^
* 이 글에 실린 사진들은 일본 나라현 호류지와 아스카, 교토에서 필자가 찍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