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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름의 바다 태안에서
죽음처럼 깊은 침묵에 잠겼던 바닷가에 돌연 활기가 넘쳐납니다. 사라진 물새 대신 젊은이들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파도 위를 경쾌하게 날아오릅니다. 아직도 이른 시각 노랑 파랑 잿빛 흰색... 갖가지 색깔의 방제복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의 바지런한 손길이 시름에 겨운 겨울 바닷가 모래와 자갈, 돌, 바위를 어루만지며 태안의 아침을 깨웁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들과 태안에 가기로 약속한 그날은 마치 어릴 적 소풍가던 때처럼 들뜬 기분이었습니다. 꼭두새벽에 깨어나 이것저것 준비물들을 챙기고 약속시간보다 이르게 현관문을 박차고 나섰습니다.
친구가 다니는 교회 버스를 타기 위해 이른 새벽 네 명이 잇달아 택시에 합승했으니 기사에겐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택시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차, 깜박 잊고 모자를 빠뜨렸네”하고 걱정했더니 나이 지긋한 기사가 불쑥 털모자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마침 어떤 손님이 새 모자를 차에 두고 갔다면서. 우리 일행이 태안으로 간다는 걸 눈치 챈 것이지요.
교회 봉사대원들을 태운 버스는 앉자마자 김밥, 떡, 귤, 사탕에 커피까지 한 아름 안겼습니다. “이거 꼼짝없이 봉사하게 만드는군.” 누군가의 농담처럼 차안 분위기가 마치 전선으로 떠나보내는 장병 대하듯 해서 태안으로 향하는 결의를 새로이 다지게 했습니다.
좁은 해안 길을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수많은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갑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곳은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태안반도의 북서쪽 만리포와 신두리 사이의 개목항이라는 곳입니다.
자그마한 포구에 좁다란 모래밭이 깔려 있습니다. 모래밭을 감싸듯 포구 외곽에는 돌과 바위가 포개어져 있습니다. 굴양식, 조개잡이가 생업인 이곳 바닷가는 잘게 부서진 조개껍질이 모래와 뒤섞여 유난히 하얀빛입니다.
먼저 도착한 자원봉사자들이 벌써 판을 벌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입었다 벗었는지 지급받은 부직포 방제복 상태는 엉망입니다. 지퍼가 떨어져 앞가슴이 터진 것, 허벅지가 드러난 것, 등어리가 구멍난 것, 옆구리가 꿰어진 것... 모두들 서로 손가락질해가며 가가대소합니다. 원주민도 물새도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린 바닷가에 봉사자들이 떠드는 소리만 가득합니다.
“와! 왕건이다. 왕건이-”
넓적한 돌을 뒤집던 젊은이 하나가 소리를 지릅니다. 예전엔 분명 게나 굴조개가 숨어 있었을 돌 밑바닥에 지금은 시커먼 타르 덩어리가 엉겨 붙어있습니다.
제법 희끄무레해진 모래밭이지만 호미나 삽으로 한 뼘 깊이만 파보아도 이내 거무죽죽한 기름 뻘이 암반 위를 지층처럼 덮고 있습니다. 처음 모래밭을 밟으며 “이야, 그 동안 열심히들 치워서 많이 깨끗해졌네”하던 감탄사도 이내 한숨으로 바뀌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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