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見不散,혹은 카르마(業)
사흘만 더 남국의 햇살을 주시길 소원했던 릴케의 싯 구절을 무색하게 이제 가을은 겨울의
옷소매를 이끌고 와 아침저녁 없이 찬 기운을 북돋아 가고 있습니다.
한 시절 가을을 구가하던 형형색색의 나뭇잎들도 시름을 털듯 날려 버리면 나뭇가지에
터잡았던 빈 둥지를 마른 구름마저 비껴가는 게 계절탓으로 여겨져 처연하기 그지없습니다.
시나브로 지는 나뭇잎, 성긴 가지를 간지르는 잔요로운 햇살, 흙으로 진 낙엽의 서걱거림,
흰 눈이 무더기로 쓸리듯 속절없는 억새의 부대낌, 그늘 잃은 왕벚나무 그루터기의 삭막함,
이 모든 것들이 자연의 순환 질서를 오롯이 순응하고 있음은 불문가지일 것입니다.
이런 계절에 조락하는 것이 이 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확연하게 꼬집을 수 없는 조락의 감정이 녹아들어 몸은 움츠리지만
열려지는 가슴을 비비고 싶도록 따스한 정리로 오붓해 지는 것 역시 계절 탓인가 봅니다.
어느 찬 바람 소슬한 저녁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나 몇 순배 술잔이 돌았습니다.
술김이기도 했겠지만 계절적 상념 탓인지 저간의 안부 가운데 어쨌든 오래 살다보면 만날
사람은 꼭 만나게 돼 있다며 이것은 자연이치이자 카르마(業)라고까지 비약을 했습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푸르던 나뭇잎이 지는 것이야 자연이치이지만 관계망의 끈으로
이어지거나 끊겨지는 사람의 인연이 자연의 순리라는 말에는 얼른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친구의 말끝에서 흰 눈밭에 노란복수초가 피어나듯
까마득히 잠재웠던 기억 하나가 불길로 날아드는 눈처럼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어느 핸가 중국 대련을 방문 하던 때의 여행길에서였습니다.
저무는 햇 무늬가 노을로 삭아지는 때, 아카시아꽃 형태를 조형한 가로등이 빛을 돋구는
길을 지나치다가 유럽풍의 카페를 연상시키는 가게의 현판을 보고 의아 했습니다.
불빛을 등으로 받으면서 들고 나는 입구에 걸린 “不見不散”이란 상호 때문입니다.
漢字야 두고라도 漢文에 대해서는 어중간 했던 터라 동반한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가이드는 몇 년 동안 안내를 해 봤지만 저런 간판을 두고 질문 받기는
처음이라며 단순한 뜻 글 해석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필연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안 될 대상”, 언젠가는 꼭 만나야만 할 숙명임을
믿는다면서 중국인은 이 의미를 인연을 뛰어 넘어 業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중국, 거기에 50여 다민족이 혼재하고 있는 중국인들,
그래서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에다 유난히 인연이나
업에 대해 의식적으로 경도 돼 있다는 나름대로 납득할만한 설명이었습니다.
당시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공감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민족간 분쟁, 환란, 전란을
겪으면서도 종내는 하나의 中和를 이룩한 중국 저변의 힘을 한문을 통해 엿본 때문입니다.
2천 5백여 년 전 공자에서 노자, 장자에 이르는 경전들을 앞에 하고서 제목 정도만 일별 했던
중국에 대한 얕은 상식으로는 넘볼 수 없다는 생각까지를 아울러서입니다.
그리고 한 나라의 의식과 생활문화의 범주를 규정하고 제단 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고
언어는 곧 한나라를 지탱하는 근본이라는 걸 부정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중국을 사랑한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의 말 가운데,
-한자는 그 안에 구축된 과거 전통과 경험을 상기시킴으로써 오늘날까지 현대를 지배하는
자체의 생명력을 지닌다.-는 정의에 공감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겨울초입 늦은 저녁, 숯불에 지글거리는 삼겹살을 앞에하고 옛 얘기를 안주로 만날 사람은
꼭 만난다는친구가 설파하는 인간적 관계망이 업으로 비약하는 걸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 끄덕거림 뒤에 不見不散에 기댄 중국 연인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어른 거렸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삶에 찌들린 하루가 찬 바람에 소슬하기만 합니다.
벌거벗은 가지에 새 잎이 피어나듯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기다림의 불씨를
지피는 것만으로 언 가슴이 절로 녹아드는 따뜻한 겨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