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단기 내려진 言路
사람의 일생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무엇을 생각했고, 왜 말했고, 어떻게 행동 했는지에 따라 뼈만 남겼는지 아니면 명성을 남겼는지가 구별 될 뿐 입니다. 그래서 ‘그 놈의 헌법’도 국민의 기본 권리로 이를 인정 하고 있습니다.
취임 이래 줄곧 언론에 대한 불신과 불평을 토해 오던 노무현 대통령이 끝내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있던’ 기자실에 ‘대못질’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프로듀서들과는 달리 기자들을 상종하기도 싫은 부류로 편까지 갈라 놓았습니다. 한솥밥 먹던 여권인사들의 만류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중국사에 불후의 기록인 ‘사기(史記)’를 저술한 사마천(司馬遷)의 집념이 문득 떠 오릅니다. 바른 말을 참지 못하는 그는 흉노를 정벌하러 갔다가 포로가 된 장군 이능(李陵)의 멸문지화를 막으려다 궁형(宮刑)을 받고도 자진(自盡)하지 않고 통사(通史)를 기록한 진정한 언론인 입니다.
이능은 한 무제(武帝 BC 156~87) 만년 즈음, 5000의 군사를 이끄는 별동대장으로 흉노정벌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죽은 줄 알았던 그가 흉노의 두터운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무제는 이능의 일족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어느 한 사람 그를 변호하는 자가 없는 가운데 사마천이 직언을 했습니다.
“이능은 소수 병력으로 오랑케 왕을 떨게 헸습니다. 그러나 원군은 오지 않고 내부 배반자가 나와 부득이 항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항복한 것은 어쩌면 뒷날 한(漢)에 보답할 의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마천은 국사(國士) 로서의 이능의 기질을 꿰뚫어 보고 적극 변호 했습니다.
바른 말은 끝내 통하지 않았고, 무제는 그를 궁형에 처했습니다. 궁형은 수염이 없어지고 얼굴이 희멀게지며 성격까지 변하는 모진 형벌입니다.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사마천은 왜 목숨을 끊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대를 이은 사관(史官)이면서도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의식에 병으로 참가하지 못해 홧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통사를 기록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스스로 ‘최하등의 치욕’이라고 한 형벌을 받았지만 사마천은 유언의 실천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세인들이 “내가 형을 받은 것 쯤은 구우(九牛)가 일모(一毛)를 잃은 것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을 것” 이라며 사기 130권을 완성 했습니다. 죽음을 무겁게 보고 가벼이 죽을 수 없는 때도 있고, 가볍게 보고 한 목숨을 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사마천의 삶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햄릿의 독백 이상의 처연함을 말해 줍니다.
지난달 17일 미얀마 양곤에서 치안부대와 민주화 시위대의 충돌 현장을 취재하다 총탄에 맞아 사망한 일본인 기자 나가이 겐지(長井健司, 50)의 죽음은 숙연함을 더 해 줍니다. 총알이 심장을 관통 했는데도 그는 고개를 쳐들면서 쫓겨가는 시위대 쪽으로 카메라를 돌렸습니다. 1~2초 뒤 카메라를 쥔 그의 오른손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분쟁과 전쟁 현장을 누비고 다녀 ‘전장의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그는 생전에 “왜 위험한 곳만 다니느냐”는 질문에 “누구도 안가는 곳에는 누군가 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눈을 감는 최후의 순간까지 본분을 다 하려고 사력을 매진한 그는 진정 기자정신의 심벌 입니다.
언론을 ‘사회의 목탁’이라고 합니다. 사회에서 계몽의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공자가 노(魯)나라 관직을 그만두고 여러 나라를 주유하는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위(衛)나라에 갔을 때, 한 국경 수비대장이 “하늘이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사방을 유력(遊歷)하게 하는 것은 크게 문교(文敎)를 일으키려는 것”이라고 제자들을 위로한 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입신출세 면에서 공자의 불운을 백성을 위한 하늘의 뜻으로 본 관(關)지기의 식견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그 이후로 문사(文事)포고 때는 목탁(겉은 금속이고 속은 나무로 된 커다란 방울)을 울려 사람들을 모았고, 무사(武事)에는 금탁(金鐸) 을 울렸다고 합니다.
물론 목탁임을 자처하는 언론이 항상 바른 말과 보도만 해 온 것은 아닙니다. 더러는 사실을 왜곡·조작하기도 했고, 권언유착으로 국민을 호도한 예도 있습 니다. 그래서 삐딱한 언론이 못 마땅해 신문고에 못질을 하고 언로에 차단기를 설치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개방된 나라의 현자들은 언론의 계몽과 감시기능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 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언론의 자유”라 했고, 볼테르는 “영국이 진정한 자유 국가가 된 것은 언론의 자유 때문”이라고 감히 말했습니다.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이 1919년 파리성명에서 언급한 언론관도 반추해 볼 명언이 아닌가 합니다. “나는 언제나 최대의 언론 자유는 가장 안전한 것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다. 어떤 사람이 바보인 경우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가 마음대로 지껄이게 하여 그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널리 광고하게 하는 것이다.”
선비의 말이 맵다고 혀를 뽑으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경종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