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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에 대해
  • 뉴스관리자
  • 등록 2007-09-12 13: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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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쯤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살았는데, 하루는 전차에서 내린 한 여고생이 까만 양복을 입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학교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멍가게 주인아주머니가 내 어께를 툭 치며 “학생, 저게 누군 줄 알아? 대통령 딸이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박근혜정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나는 그 때 구멍가게 앞에서 그 여고생을 본 적이 있을 뿐, 정치인 박근혜씨의 실물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의 이미지를 포함한 일체의 정보는 신문과 텔레비전과 잡지에서 전해들은 것들입니다.

관악산에 가끔 올라가는데 등산객들이 대통령선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많이 듣습니다. 등산로에서 들리는 선거 화제는 한나라당 쪽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하루는 일단의 중년 남성들이 약수터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이명박 후보를 몰아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명박이 박근혜한테 무릎 꿇고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거야. 안 그래.”
“물론이지. 안 그러면 선거 못 이겨.”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친이명박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만약 이명박씨가 그 자리에서 이들의 야외토론을 들었다면 박근혜씨한테로 달음질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여 보았습니다. 과연 누가 얘기했듯이 한국인은 세계에서 최고로 정치적입니다.

이명박씨와 박근혜씨가 경선 후 처음 만나 “정권교체를 이룩하자”며 덕담을 나눴다고 합니다. 그 등산객들이 만족스럽게 느낄지는 모르나, 두 사람 모두가 유권자에게 보여줘야 할 최소한의 정치적 제스처는 취했다고 생각합니다.
덕담 뒤에 흐르는 기류를 시중 사람들이 알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신문에 보도된 그들의 대화 한토막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명박씨가 대선과 관련하여 장차 상의하겠다고 말하자, 박근혜씨는 “후보 중심으로 하시고...”라고 응대했다고 합니다. 이 후보에게 더 이상 말을 깊이 하지 말고 내 속을 헤아리라는 정치적 반어법(反語法)의 극치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지명경선에서 승자 이명박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패자 박근혜씨의 말은 또렷이 기억합니다.
“경선 패배를 인정합니다. 경선결과에 깨끗이 승복합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패배인정은 당연한 것이고, 대통령이 되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겠다는 정치철학이 담긴 후보지명수락 연설이 그날의 국민적 관심사였어야 합니다.

헌데 승자의 감동적 메시지는 없었고, ‘인정’과 ‘승복’이라는 패자의 언어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선거의 패자가 공개적으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개인에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승자는 웃으면 되지만, 패자는 울기도 힘듭니다. 사람들은 패자에게 잔인한 요구를 눈짓합니다. 패배를 인정하라고...
박근혜씨는 그 요구를 간파했고, 그래서 그의 정치참여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세상은 그의 행동을 ‘아름다운 패배’라고 칭찬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정치공학의 관점에서 말하면 정치적 감각이 예민한 이명박씨도 그 아름다움을 퇴색시키는 순간작업에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지명 경선은 압권이었습니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김영삼 김대중씨가 격돌했습니다. 김영삼씨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을 뒤엎고 김대중씨가 역전 승리했습니다. 그 때 김영삼씨는 그 자리에서 깨끗이 승복을 선언함으로써 아름다운 경선의 초석을 세웠습니다.

1999년 12월 미국을 한 달 이상 헌정위기로 몰아넣었던 대통령선거 개표시비 사태를 기억할 것입니다. 총득표 수에서 조지 부시를 앞섰던 앨 고어 후보는 승부처인 플로리다 개표 재판사태 중에 패배선언의 결단을 내림으로써 미국 민주주의의 파행을 극적으로 구해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본령입니다. 선거는 승자의 환호가 아니라 패자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박근혜씨는 한국 정당정치사에 적잖은 기여를 한 셈입니다.

박근혜씨가 정치인으로 등장한 것이 10년 남짓밖에 안 됩니다. 대단한 콘텐츠를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냉정하고 절제된 일종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지금 할거하는 정치인들 중에는 돋보입니다.

박근혜씨의 연설이 사람을 감동하게 한 것은 경선승복의 말보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일생일대의 패배를 맞아 그렇게 초연한 표정을 짓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의 경쟁자 중 한 사람을 그걸 ‘절제의 미학’이라고 말했습니다.

패배를 선언하는 것도 정치적 행동이란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이, 그 뒤에 흐르는 갈등의 역류와는 별도로, 패자의 새로운 정치자산으로 변합니다. 참으로 정치와 선거란 알 수가 없는 게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끝없이 승리와 패배의 반전이 이어집니다.

미국도 우리와 비슷하게 선거를 통해 대통령제 민주주의를 실행하면서도 그 스타일은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예비후보로 등록했다가 여론조사 인기가 오르지 않으면 자진 포기합니다. 주별 예비선거 과정에서 일정 수준의 득표를 얻지 못하면 스스로 중도포기선언을 합니다. 아마 선거자금을 조달할 수 없어 그럴 겁니다. 경선에서 강제 탈락시키는 ‘컷오프’란 미국말은 원래 골프용어 같은데, 우리에겐 정치용어가 되었습니다.

미국 정당의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후보가 결정되면 선거캠프는 승자의 사람들로 구성되고 패자들은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앨 고어의 예에서 보듯 대통령 본선에서 패자는 거의 정치무대에서 퇴장합니다. 마치 미국 서부극에서 총잡이들이 결투를 벌이다 지는 쪽이 석양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평선너머로 사라지듯이 말입니다.

우리 정치문화는 다릅니다. 마치 옛날 조선시대 당파싸움에 져서 권력에서 물러났지만 조정주변에서 와신상담과 권토중래의 끝없는 권력게임을 벌였듯이 정치할 수 없을 정도로 늙거나 대권을 잡기까지 퇴장하지 않습니다. 권좌에서 물러나서도 가능하면 상왕노릇을 합니다.

박근혜씨에게 서부총잡이 같이 행동하라는 것은 무리겠죠? 대통령선거도 아니었고, 그것이 우리의 정치문화도 아니라고 할 테니까요. 그러면 그는 어떤 정치적 미래를 구상하고 있을까요. 이명박 후보와의 관계는 참 풀기 어려운 ‘박근혜의 난제’로 다가올 것입니다. 대선 이후 새롭게 빠르게 변해갈 시대조류를 안아야 할 그의 정치 항해가 망망대해에 떠 있는 편주처럼 보입니다. 고독한 서바이벌게임이 이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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