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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낚은 위수의 현자 강태공[姜太公]
  • 뉴스관리자
  • 등록 2007-09-05 12: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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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하건대, 한 나라의 융성과 몰락은 비슷한 바가 있다.

창업 초기의 나라들은 여러 집단과 종족 간에 적지 않은 갈등을 겪는다. 섞사귀어지지 않는 사상과 풍습, 집단간의 권력 투쟁이 그 배경이다. 이런 일들은 그 나라가 새롭게 태어나려는 몸부림으로 작용한다. 그 열기는 모든 쇠를 한 곳에 녹이는 용광로와 같고, 제련되어 나온 쇠를 두들겨 담금질하는 효과가 있다. 곧 여러 나라로 갈라질 듯한 초창기의 불꽃 튀는 투쟁은 더욱 견고한 새 나라를 낳으려는 산고의 몸부림인 것이다.

새 나라의 담금질이 끝나면 역사의 꽃이 활짝 핀다. 이른바 태평성대가 열리는 것이다. 위기는 대개 태평성대의 정점에서부터 생장한다. 군주에게는 더 이상 정적이 없고, 복종하지 않는 나라가 없을 때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화려한 개화기(開化期) 끝 무렵, 그 나라는 몰락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태평성대의 영향으로 내리막에도 영화를 구가하지만, 안정과 영화는 사치와 방탕으로 빠져들고 이윽고 파국으로 향한다. 그 파국의 광경 또한 많은 나라들이 비슷하게 연출해 보여준다는데 역사의 통속성이 있다. 마치 사인파 곡선을 그리듯 역사는 그렇게 되풀이 된다.

중국의 고대 국가인 ‘하-은-주’의 명멸은 그 과정을 너무도 충실하게 보여준다. 마치 잘 짜여진 한 편의 각본을 시대에 따라 배우가 무대장치를 조금씩 바꾸어 재연하는 듯하다.

사마천의 ꡔ사기ꡕ는 황제 헌원(黃帝 軒轅)을 중국 역사의 시조로 삼았다. 그 뒤를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요(堯), 순(舜)이 이으니, 이 다섯 임금을 오제(五帝)라 칭하였다. 흔히 태평성대를 요순시대(堯舜時代)라 하는데, 요와 순의 시절에 도리가 바로 서고 덕치의 교화가 펼쳐졌음을 의미한다.

그 이후는 하(夏)나라의 시대이다. 하우(夏禹)는 22년간이나 계속된 대홍수를 잘 다스린 공로로 순 임금에게서 제위를 이어받았다. 우는 익에게 양위하였으나, 익은 곧 삼년상을 끝낸 우의 아들 계(啓)에게 제위를 돌려 주었다. 훗날 계가 아들 태강에게 양위하니, 비로소 제위를 자손에게 승계시키는 전통이 확립되었다. 그 전까지는 덕망에 따라 임금자리를 전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으나, 하나라에 이르러 직계 자손에게 자리를 전하는 왕조(王朝) 체제가 굳어진 것이었다. 이때부터 국가란 곧 왕조를 의미하게 되었고, 국가의 흥망성쇠도 그 왕조와 운명을 함께하였다.

하는 중국의 문화를 일신하며 17대 439년을 이어왔다. 시조 우는 성인으로 숭앙되었으나, 왕조의 말년은 극히 무도하고 패덕하였다. 마지막 천자(天子)인 걸(桀)은 전례가 없는 폭군이었던 것이다.

걸은 채구가 건장하여 호랑이, 표범 같은 맹수와 맨손으로 싸워 이길 정도였다. 그러나 영웅호걸이란 역사의 격랑 속에서만 빛을 발하는 법인가. 그는 넘치는 기개를 향락과 방탕으로 소진하는데 열심을 기울였다. 화려한 궁전을 짓고, 천하의 미녀들을 불러 모아 시중을 들게 하였다. 또 악사와 광대들을 불러 잔치를 즐겼는데, 노래와 춤은 음탕함이 점입가경이었다. 급기야 궁궐 안에 큰 연못을 만들어 술로 가득 채우고, 포육(脯肉)으로 언덕과 동산을 만들었다. 거기서 남녀와 군신을 가리지 않고 알몸으로 뱃놀이와 목욕을 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걸에게는 말희(妺喜)라는 총애하는 요부(妖婦)가 있었다. 그들은 연일 잔치를 베풀고는 3천이나 되는 선남선녀들을 알몸으로 주지육림에서 뒹굴게 했다. 북을 쳐 신호를 보내면 선남선녀들은 일제히 춤을 추거나, 술의 못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고, 뱃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물도 아닌 술의 못에 빠졌으니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걸과 말희는 이러한 광경을 즐기며 서로를 탐닉했다. 충신들의 간언을 귓등으로 듣고 오히려 그들을 처벌했음은 물론이다.

천하의 인심은 상(商)나라로 몰리고 있었다. 상 땅을 다스리는 성탕은 키가 9척이나 되는 거인이었다. 인자하고 자애로워 따르는 백성들이 날로 늘었고, 제후들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걸왕에게 충간을 하다가 화를 당한 신하들의 유가족을 돌보아주었다. 걸은 이를 역모로 규정하고 탕을 하대(夏臺)라는 깊은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감옥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탕은 걸에게 수많은 재물과 보화를 준 다음 구사일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삼아 기어코 걸을 몰아냈다. 걸은 ‘하대에서 탕을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며 죽었다.

성탕이 천자가 되어 새 시대를 여니 곧 은(殷) 왕조이다. 원래는 상(商) 왕조라고 해야 맞겠으나, 훗날 마지막 도읍지가 은(殷) 땅이라 후세의 사가(史家)들이 은왕조로 이름붙인 것이다.

은왕조는 30대 645년간 지속되었다. 성탕과 그의 자손들은 예의와 법도를 중하게 여겨 올바른 정사를 펴는 데 주력했다. 그런데 은 왕조의 모래시계를 엎어 놓은 듯 그 마지막 모습이 하 왕조를 닮아갔다. 은의 마지막 임금 주(紂)는 제 조상 성탕을 닮지 않고 걸의 판박이였다.

주는 외모가 장대했다. 소 몇 마리가 끄는 수레를 거꾸로 끌고 달릴 수 있는 장사였다. 게다가 박식하고 언변 또한 유창하였으니 걸을 능가하는 호걸 영재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사람이 덕을 갖지 못하면 어떤 악마가 되는지 주왕은 잘 보여주었다.

걸에게 말희가 있었듯이, 주에게는 달기(妲己)라는 요녀(妖女)가 안겨 있었다. 그들은 도성 안에 높은 누대를 쌓아 주지육림을 만들고 황음(慌淫)을 일삼았는데, 포악무도함과 음란함이 걸의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 주는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형국이었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자는 포락지형(炮烙之刑) 에 처했다. 숯불이 이글거리는 구덩이에 기름을 바른 쇠기둥을 걸쳐 놓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세 발도 떼지 못해 대부분 숯불로 떨어져 타 죽거나, 미끄러운 쇠기둥에 대롱대롱 매달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주와 달기는 이런 모습을 보며 성합을 즐기는 변태를 연출하였다.

패덕한 군주에게도 충신은 있었다. 삼공(三公)인 구후(九侯), 악후(鄂侯), 희창(姬昌)은 천자를 악덕의 늪에서 구해 내고자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쏟았다.

구후는 정숙하고 재색을 겸비한 딸을 주에게 바쳤다. 요녀 달기에게서 눈을 돌리게 하려는 최후의 책략이었다. 이러한 고육지책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는 구후의 딸 역시 달기와 더불어 주지육림의 축제를 즐기기를 요구했다. 정숙한 구후의 딸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감히 천자의 명을 거역하다니!”

격노한 주는 그녀를 참하고 말았다. 물론 사건이 이렇게 된 데는 달기의 암수가 작용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구후마저 죽여 포를 떠서 소금에 절였다. 이를 만류하며 따지던 악후도 구후와 같은 꼴을 당했다.

“슬프다, 천도가 어그러졌음이여!”

깊이 절망한 서백(西伯:서쪽을 다스리는 제후들의 우두머리) 희창은 자기 영지인 주(周)로 돌아와 탄식하였다. 그는 선정을 베풀며 세력을 키워갔다. 백성들은 그를 현자요 성인으로 우러러보았다. 이에 대해 「주본기」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서백은 오로지 어진 정치를 행하고 늙은이를 공경하며 어린이를 사랑했다. 그가 어진 사람에게는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고 낮에는 재사를 접대하기에 식사할 겨를도 없었으므로 재사들도 대부분 서백에게 몰려들었다. 고죽국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서백이 노인을 우대한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서백을 따랐다.




간신 숭후호(崇侯虎)는 서백의 득세를 시샘하여 주에게 참소하였다.

“서백 희창은 평소에도 감히 천자의 일을 좋지 않게 여기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가 널리 인심을 모으는 중이라니 이는 분명 역모의 조짐입니다.”

주는 지체없이 희창을 도성으로 송환하여 유리(羑里)라는 곳에 가두어 버렸다. 유리란 하왕조의 하대(夏臺)처럼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든 곳이었다. 유리는 오늘날 하남성 탕음현 북쪽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ꡔ중국고대신화ꡕ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유리는 은왕조 최대의 감옥이었다. 이는 지하 깊은 곳에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그 주위는 까마득히 높고 두터운 담으로 둘러져 있어 날개가 있어도 쉽사리 날아 넘기 힘든 곳이었다.


희창은 벗어날 길을 모색하였다.

ꡔ사기ꡕ 「주본기」에 따르면, 이때 희창이 역(易)의 팔괘를 더 고안하여 합이 64괘가 되도록 했다고 전한다. 그가 빠져나갈 술책을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낮밤조차 알 수 없는 지하 감옥에서 홀로 꿍꿍이를 낸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때마침 희창에게는 훗날 문왕사우(文王四友)라고 불린 네 충신이 있었다. 태전, 굉요, 산의생, 남궁괄이 바로 그들이었다. 네 신하는 황급히 유리로 달려가 관리에게 뇌물을 써서 희창을 면회하였다.

희창은 궁리 끝에 유리를 벗어날 계책을 마련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옥졸의 감시가 심해 서로 안부만 물을 뿐 대책을 의논하지 못했다. 자칫 말이 샜다가는 당장 포격형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언제 죽음의 명이 떨어질지 모르는 판데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장고 끝에 희창은 몸짓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희창은 오른쪽 눈을 깜박거렸다.

‘주가 호색한이니 미인계를 써라.’

다음엔 배를 두드렸다.

‘주의 욕심이 한이 없으니 재물을 받치라.’

다시 희창은 두 발로 땅바닥을 빠르게 굴렀다.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빨리 실행하라!’

주군의 뜻을 알아챈 네 신하는 서둘러 일에 착수하였다.

주는 포악이 발동되면 더욱 그 강도를 더해가는 새디스트였나 보다. 그는 희창에게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잔혹한 시험을 하였다. 인질로 와 있던 희창의 장남 백읍고를 산 채로 커다란 솥에 삶아 죽였다. 거문고를 잘 타는 착하고 성실한 희창의 아들은 반항 한 번 못하고 비명에 갔다. 주왕은 그렇게 끓인 고깃국을 희창에게 먹이고자 하였다.

“항간에서는 희창을 성인이라 칭송한다던데, 내 이제 두고보리라. 제 놈이 과연 성인이라면 선견지명이 있어 제 아들 놈을 먹지는 못할 테지.”

주는 신하들의 호기심을 돋우며 떠벌였다.

얼마 뒤 국을 가져갔던 사자가 돌아와 고했다.

“서백 희창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천자의 은혜에 감읍하며 국을 마셨습니다.”

주는 통쾌하게 웃었다.

“흥, 제 아들을 삶아 끓인 국도 멋모르고 넙죽 받아 먹는 놈이 무슨 얼어죽을 성인이란 말이냐!”

이를 통해 보건대, 주는 은근히 희창을 겁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희창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은 데다, 성인이라는 말까지 도니 자기를 넘볼지도 모른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 악독한 시험은 희창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 사이 문왕사우는 미인과 진귀한 보물과 재물을 구해 주왕에게 바쳤다. 유신국의 늘씬한 미인들은 주왕의 마음을 달뜨게 만들었고, 각국에서 구해 온 보물은 그의 마음을 녹였다.

“나는 본래 서백을 괴롭힐 마음은 없었노라. 다만 코가 크고 귀바퀴가 없는 녀석이 내 귀에 대고 자꾸 험담을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주는 숭후호 핑계를 대며 희창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유리에서 빠져나온 희창은 주에게 땅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주는궁시부월(弓矢斧鉞), 즉 활과 화살과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하사하였다. 이는 곧 주변 제후국을 정벌해도 좋다는 천자의 신표였다. 이때까지도 주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그 활과 도끼에 의해 자신이 난자되리라고는.


주왕의 광기 어린 정치는 점점 그 강도를 더해 갔다. 곰 발바닥 요리를 충분히 익히지 않은 요리사를 그 자리에서 죽이는가 하면, 노인은 뼈가 시리다는 말을 확인하기 위해 강가를 서성이는 한 노인을 붙잡아 다리를 잘라 뼈를 확인하는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은나라 말기에 삼인(三仁)으로 불리며 칭송받는 왕족이 있었다. 주왕의 이복 형인 미자(微子)와 숙부 비간(比干)과 기자(箕子)였다. 이들은 주왕의 폭정을 충간(忠諫)으로 바로잡으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유리에서 돌아와 주왕의 신임을 얻은 서백 희창은 나날이 힘을 키워갔다. 견융, 밀수, 기국을 정벌하는 한편 뭇 백성들의 신임도 두텁게 쌓으며 묵묵히 복수의 칼을 갈았다. 억울하게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주의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터였다. 그러나 아직 천자에게 대항하기엔 무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또 희창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태공망(太公望)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태공은 ꡔ사기ꡕ와 ꡔ십팔사략ꡕ에서는 희창의 아버지 계력(季歷)으로 해석하나, 일각에서는 조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여튼, 태공은 주나라를 크게 일으킬 성인이 찾아올 것이라고 예언하고는, 그를 몹시 기다렸다고 한다. 태공망이란 바로 태공이 기다린 사람이란 뜻이다. 희창 역시 그를 목마르게 기다리던 참이었다. 주왕은 이미 덕을 잃었고, 자신은 성인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세력까지 키웠지만 그것을 운용할 책사를 찾지 못한 것이었다.

ꡔ중국고대신화ꡕ는 태공망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를 전한다.

하루는 희창의 꿈에 천제(天帝)가 나타나 말했다.

“창아, 너에게 훌륭한 스승으로서 너를 도울 만한 지혜로운 사람을 보내 주겠노라. 그의 이름은 망(望)이니라.”

천자 뒤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눈썹과 수염이 눈처럼 희고 눈에는 안광이 그윽하게 빛났다. 희창이 노인에게 절을 하자 노인도 맞절을 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희창의 뇌리엔 꿈 속의 노인이 깊이 인각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오호라, 그가 바로 태공께서 그토록 기다리던 주나라를 일으킬 성인이로구나.”

그 후 희창은 사냥을 핑계 삼아 꿈 속의 성인을 찾아다녔다.

하루는 문왕이 사냥을 나서기에 앞서 말했다.

“이번에는 위수 북쪽 강변과 숲을 누빌까 하는데, 어떤 짐승을 잡을 것 같은가?”

태사 편(編)은 거북의 껍질을 태워 점을 쳤다. 희창은 일말의 기대감으로 점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태사가 햇살을 받은 듯 환하게 웃으며 점괘를 노래로 불렀다.




田于渭陽 將大得焉

非龍非彲 非虎非熊

兆得公侯 天遺汝師




위수에 사냥을 가면

큰 수확을 얻겠네

용도 이무기도 아니요

범도 곰도 아닌

제후의 우두머리를 만날 테니

하늘이 주신 스승이라네



희창은 퍼뜩 귀가 열리는 것 같았다.

“점괘가 그토록 길조인가?”

“옛날 저의 조상인 사관 주(疇)가 우 임금을 위해 점을 쳐 고요(皐陶)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의 점괘는 바로 그 일과 비교할 만한 괘입니다.”

고요는 문헌상에 전하는 최초의 재상이다. 순 임금이 노년에 이르러 우에게 양위하려 하자 우는 사양하고 덕망이 높은 고요를 천거하였다. 고요는 순 임금의 재상이 되어 치세를 도왔고, 이어 사(師)의 역할로 우를 보필하여 하왕조의 기틀을 닦았다.

점괘를 들은 희창은 벅찬 기대감과 설렘에 온통 사로잡혔다. 고요와 같은 인물이라면 태공이 기다리던 인물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희창은 사냥을 취소하고 사흘 동안 목욕재계하였다. 그런 다음 비로소 수레를 몰아 꿈 속의 성인을 찾아 나섰다.

위수(渭水)는 감숙성 중부에서 발원하여 주나라의 서울인 호경(鎬京:서경, 장안)을 감싸 흘러 황하로 이어져 있다. 때문에 호 땅은 물 위에 뜬 섬처럼 보인다. 이러한 위수는 백성들에게 풍부한 물을 제공하고 뱃길을 열어주는 동시에 도읍지의 방책선 구실을 했다. 훗날 한(漢) 고조 유방이 이 곳에 도읍을 정한 이유도 위수가 만드는 지세를 덕을 보려는 뜻이었으리라.

희창은 위수 북쪽의 산과 들을 샅샅이 훑었다. 마음은 콩밭이라, 사냥은 신하들 차지였고 희창은 들의 농부나 산골의 늙은이까지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꿈 속에서 보았던 성인은 없었다.

희창이 기다리던 성인은 산과 들이 아니라 강가에 있었다.

위수 한 어귀에 옴팡하게 들어가 물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갈대 숲으로 둘러싸여 고즈녁하기조차 한 그 곳에 한 노인이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너럭바위에 띠풀 방석을 깔고 앉은 그의 이름은 강여상(姜呂尙)이었다.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은 동해(東海) 근처 사람으로, 그의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이 되어 우(禹) 임금이 물과 땅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 크게 공을 세웠다.




ꡔ사기ꡕ 「제태공세가(濟太公世家)」 첫머리에 강태공은 위와 같이 소개되어 있다. 그의 성은 강(姜), 이름은 여상, 자아(子牙)로 추측되는데, 훗날 낚시꾼의 대명사인 강태공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우 임금의 치수 사업에 공을 세워 여(呂) 지방에 피봉된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때에 이르러 가세가 기울기는 하였지만, 그는 천하를 경영하리라는 꿈을 품고 실력을 닦았다. 그러나 나이 칠십이 넘도록 재주를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출세는커녕 지독한 가난이 언제나 그의 삶을 옥좨었다.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야사와 전설도 있는데, 간추리면 다음과 대략 같은 내용이다.

여상은 곤륜산에서 40년간 도를 닦고 세상에 내려와 마씨와 결혼하여 점치는 일을 하며 살았다. 이때 옥석비파라는 요괴가 세상을 어지럽혔는데 여상이 그를 물리쳐 주왕에게 벼슬을 받았다. 그런데 주왕의 총비 달기는 구미호가 변신한 요괴였다. 달기는 옥석비파의 원수를 갚고자 강여상을 죽일 흉계를 꾸몄다. 이를 안 여상은 벼슬에서 물러나 숨어 지내게 되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ꡔ사기ꡕ의 기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위수 강가의 은자가 되어 낚싯대를 드리우고 출세간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맑은 강물은 정지된 듯 고요하기만 했다. 새도 울지 않았다. 간혹 물 속에 뿌리를 내린 같대밭 근처에서 솟구쳐올라 ‘풍덩!’ 정적을 깨 놓던 잉어의 장난도 없었다.

참으로 긴긴 기다림의 세월이었다. 세상사에 무심한 듯 낚시에 매달려 있지만, 실은 오래 전부터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칠십이 넘도록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닦아온 그였다. 스스로 운을 짚어 위수 강가에서 주군을 만날 인연이 있음은 알았으나, 때는 오로지 하늘에 매인 것. 그 정확한 때를 몰라 오래 전부터 한자리에서 낚시로 소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앉았던 너럭바위에 엉덩이 자국이 날 정도였다고 했으니, 적지 않은 세월을 그 곳에서 기다렸음을 알 수 있다.

일설에는 이 날 여상은 곧은 낚시, 즉 곧게 편 낚시바늘을 물 속에 던져 놓았다고 한다. 평생을 기다려 온 만남을 물 속의 미물들에게 방해 받고 싶지 않기 위해서리라. 그렇게 여상도 희창 못지 않게 자신의 재주와 덕을 중용할 주군을 기다렸다.

어느 순간, 정적을 깨는 말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냥감을 쫓는 고함소리와 군사들의 뜀박질소리도 가까워졌다. 마차가 달려와 멎는 소리가 났다. 갈대를 헤치는 소리, 장중한 발소리... 이윽고 서백 희창의 근엄한 모습이 물에 비쳤다. 뒤로는 무장을 한 신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여상은 찌에 시선과 정신을 집중하였다.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미동도 않는 찌에 달아매고자 하였다. 찌 아래는 곧은 낚시가 달려 있고, 곧은 낚시에 걸려들 용을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희창은 얼마간 거리를 둔 채 정적 속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낚싯대를 드리운 백발의 촌로를 바라보았다. 세파에 찌든 야윈 얼굴에 수없이 기워 입은 의복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눈처럼 흰 머리카락과 드센 기운이 느껴지는 길고 흰 눈썹, 인기척에도 바위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근엄함은 속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 하늘이시여!’

희창은 가는 신음을 토하며 하늘에 감사를 올렸다. 강가에 선 한 그루 노송처럼 의연한 노인은 분명 꿈에 천제가 소개해 준 스승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떤 말을 붙여야 할지 선뜻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선고의 유시가 있었다 하나 제후의 체면에 덮어놓고 반가워하며 스승으로 받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낚시라는 화제를 통해 시작되었다.

“낚시를 즐기고 계십니까?”

희창이 다가가 공손하게 물었다.

그때서야 여상에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하고 대답하였다.

“낚시는 즐기는 건 범인(凡人)의 일이요, 현자는 뜻을 얻기를 즐기지요.”

범상치 않은 대답에 희창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노인장의 낚시에는 어떤 뜻이 있는지요?”

물꼬가 트인 대화는 두 계곡의 물줄기가 어우러져 대하(大河)를 이루듯도도하게 굽이쳐 흘렀다.

“미끼로 고기를 낚는 것은 보수를 주어 인재를 채용하는 것과 진배 없지요. 가는 낚싯줄과 작은 미끼로는 잔챙이밖에 낚을 수 없고, 큰 고기를 잡으려면 줄과 대와 미끼를 모두 그에 맞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고기가 일단 먹이를 물게 되면 낚시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은 녹을 먹게 되면 그 주군에게 복종하게 되니 같은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언뜻 보아 낚시는 작을 일 같지만 깊은 정취를 알면 천하의 일까지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천하 경영의 웅지가 있으니 합당한 대우로 채용하라는 암시였다. 희창이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속내를 숨기고 다시 물었다.

“어떻게 인심을 수렴하면 천하 백성들이 복종하겠습니까?”

여상의 대답은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천하는 군주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천하 사람의 것입니다. 따라서 만백성과 이익을 함께하는 자는 천하는 얻고, 천하를 홀로 가지려 한다면 천하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고 말 것입니다.”

속내를 들킨 희창은 움찔하였다.

여상은 여전히 담담한 어투로 치도(治道)를 설하였다.

“하늘에는 만물을 운행하는 때가 있고, 땅은 만물을 낳아 기르니 여기에 사람이 어우러지는 것이 인(仁)입니다. 또한 사람을 환난에서 구하고 위급함을 도와주는 것이 덕(德)입니다.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의(義)라 할 것입니다. 인과 덕과 의로써 진실한 이(利)를 이루는 것을 도(道)라 하니, 천하는 도에게로 귀속하게 되는 것이 이치입니다.”

이미 여상에게 깊이 매료된 희창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참으로 그대의 말씀이 신실합니다. 내 어찌 이를 천명으로 여기고 받들지 않으리오.”

희창은 여상에게 스승의 예로써 재배을 올리고 청하였다.

“우리 태공께서 이르기를 ‘장차 성인(聖人)이 주나라에 올 것이며, 주나라는 그로 인해 일어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태공께서 그토록 기다린 분이 바로 선생이 아니신가 합니다. 저와 함께 궁으로 가서 더 큰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옵기를 앙망합니다.”

여상도 희창에게 주군을 맞는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희창은 자신의 오른편에 여상을 태우고 손수 수레를 몰아 궁궐로 돌아갔다. 주군으로서 신하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태공망 강여상을 얻은 서백 희창은 용이 구름을 얻은 듯 비상하였다.

문왕의 사(師)가 된 강태공은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실력으로 주나라를 쇄신시켰다. 예와 덕을 숭상하는 나라의 법도를 바로 세우고, 새로운 병법으로 군사를 훈련시켰다.

여상은 병서의 고전이 된 ꡔ육도ꡕ라는 명저를 남겼다. 이는 훗날 장량이 기인 황석공에게서 받은 ꡔ삼략ꡕ과 함께 엮어져 ꡔ육도삼략ꡕ으로 전한다. 이는 무경(武經) 칠서(七書)의 으뜸으로 모든 병법서의 근간이 되었다. 후세의 평자들은 이 책이 강태공의 저서가 아니라고도 하나, 직접 찬술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골계가 강태공에게서 나온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제태공세가」는 강태공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주 서백이 공평한 정치를 하며, 우(虞)나라와 예(芮)나라의 분쟁을 해결하자 시인들이 서백을 ‘천명을 받은 문왕(文王)’이라고 칭송하였다. 문왕이 밀수, 견이 등의 나라를 정벌하고 풍읍을 크게 건설하고 천하의 3분의 2를 귀순하게 한 것들은 대부분 태공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다.

당당히 왕을 칭하기 시작한 희창의 세력은 은나라를 넘볼 만큼 되었다. 이에 조이(祖伊)가 주왕에게 말했다.

“서백 희창의 세력이 심상치 않습니다. 군사를 길러 땅을 넓히고, 백성들의 인심을 사로잡고 있으니 경계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주지육림에 빠진 주왕은 조이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염려할 것 없다. 그는 내게 대들 인물이 못됨을 익히 보았지 않느냐. 제 아들의 고기를 먹은 자가 어찌 천자를 넘본단 말인가. 더욱이 나는 천명을 받은 몸, 하늘이 보살피시니 무엇을 드려워하랴!”

주왕의 방심을 틈타 문왕은 더욱 힘을 길렀다. 우(于)를 정벌하고, 자신을 참소했던 숭후호를 굴복시켰다. 도읍을 기산 아래에서 풍읍(豊邑)으로 옮겼는데, 주(紂)의 도성 조가에 한 발 더 다가선 것이었다. 그러나 문왕은 장남 백읍고의 복수를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으니, 왕을 칭한 지 9년 만이요 제위는 50년이었다.

태자 발(發)이 자리를 이으니 곧 무왕(武王)이다. 태공은 무왕에게 사상보(師尙父)로 불리었는데, 이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스승’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딱히 재상이라는 직책이 분명하지 않은 당시의 사(師)나 보(父)는 재상에 다름 아니었다.

무왕은 상보 강태공을 군사(軍師)로 삼고 군사를 일으키고 제후들에게 명했다.

“그대들은 사병을 모아 배를 띄워 출정하시오! 늦게 오는 자는 목을 벨 것이오!”

무왕은 앞장서서 배를 타고 은나라로 향했다. 그때 강에서 큰 물고기가 한 마리 배 위로 뛰어 올라왔다. 몸뚱이가 온통 하얀 물고기였다. 무왕은 그 것을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흰색을 숭상하는 은나라를 정벌하겠다는 표징이었다.

맹진 나루에 모인 제후는 무려 800을 헤아렸다. 무왕의 수하가 아닌 제후들도 주의 학정에 반발해 모여 든 것이었다.

“능히 폭군 주를 타도할 수 있습니다!”

제후와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때 묘한 변수가 생겼다.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져 무왕이 머무는 지붕을 덮친 것이다.

“아, 아직 천명이 나를 돕지 않으니 정벌할 수가 없구나!”

무왕은 한탄하며 군사를 돌리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주왕 숙부 비간과 기자가 목숨을 걸고 간언하였다.

“천제의 보살핌으로 위태로운 지경을 면하였으니 지금부터라도 성심을 바르게하여 사직을 보존하소서!”

주왕은 더욱 기고만장하였다.

“내가 천자가 된 것도 천명이요, 나를 지키는 것도 천명인데 감히 누가 대적하랴!”

비간은 물러서지 않고 사흘 동안이나 소리를 높였다.

“하늘의 진노가 바야흐로 탑전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부디 바른 정사를 펼치소서!”

귀를 막고 있던 주왕이 마침내 노기를 드러냈다.

“백성들이 일컫기를 그대가 성인이라 하니, 궁금한 게 있다.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가 있다던데, 어디 확인해 보자.”

주왕은 숙부를 죽여 심장을 꺼내고야 말았다.

“아아, 정녕 패덕이 하늘에 닿았도다!”

절망한 기자는 미친 척하고 남의 집 종이 되어 숨어 살았다. 주왕이 언제 자신의 심장까지 확인하려 들지 모를 일이었다. 이에 주왕은 기자를 잡아 옥에 가두어 버렸다. 어진 신하가 셋만 있어도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고 하였건만, 은말의 삼인(三仁)으로 불리던 미자, 기자, 비간이 모두 도망치거나 죽거나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었다. 모든 백성이 슬퍼하며 주왕에게서 등을 돌린 건 이미 오래 전이었다. 어쩌면 삼인(三仁)의 덕으로 말미암아 명맥을 유지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비간이 죽고 기자가 투옥된 것을 본 무왕은 때가 무르익었을 감지하였다. 그는 다시 정복의 깃발을 올리고 출정에 앞서 점을 쳐 보았다.

태사가 거북 껍질에 글을 쓰고 불에 태웠다.

“심히 불길하옵니다. 거병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사의 말 끝에 폭풍우가 몰아쳐 장막을 흔들어 놓았다.

“아, 아직도 하늘은 저 무도한 주를 돌본단 말인가!”

무왕은 낙담하여 감히 출정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대신과 제장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때 누군가 불쑥 신탁(神卓) 앞으로 나왔다. 백발에 은빛 수염이 배꼽까지 내려온 강태공이었다.

“말라비틀어진 뼈다귀와 풀 따위가 어찌 천지화복 길흉을 알리오!”

강태공은 탁자 위의 거북 껍질과 그것을 태우는 데 쓰는 풀더미를 손으로 쓸어내려 발로 밟아 버렸다.

“천지간의 으뜸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굳게 결심한다면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때를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우니, 출정해야 합니다!”

강태공이 좌중을 둘러보며 호기 넘치게 말했다.

“상보의 의견이 장히 옳소이다. 천륜을 어기고 오직 제 몸과 부인만을 위하는 폭군 주에게 천벌을 집행하려 한다. 출정하라!”

태자 시절부터 강태공에게 착실히 수업을 받았던 무왕이 전적으로 동의하고 나왔다. 이빨이 겹으로 난 그 역시 다소 성정이 급하고 과격했다. 용기를 얻은 대신과 장군들도 우렁찬 소리로 복명했다.

“삼가 명을 따르겠나이다!”

첫 출정에서 회군한 지 2년만이었다. 강태공은 오른손에 황금 장식이 박힌 도끼를, 왼손에는 군기를 들고 출정 선서를 하였다. 그가 전쟁 지휘에 대한 전권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왕은 부친과 닮은 신하에게 부친의 옷을 입혔다. 그 신하를 태운 수레에 부친의 위패를 모시고 자신의 뒤에 세웠다. 문왕을 따르던 제후들의 동참을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그 뒤를 융거(戎車; 기마 전차) 300대, 용사 3000명, 갑사 45000이 일사분란한 대오를 지어 따랐다. 모두 강태공에 의해 단련된 일당백의 정예 병사들이었다.

백성들도 즐거이 무왕의 군대를 환송하였다. 한시 바삐 폭군을 몰아내라고 기원하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환송하는 무리 가운데서 불쑥 나와 길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되옵니다. 군사를 돌리소서!”

길을 막은 두 사람이 근엄하게 진언했다.

“그대들은 누구기에 감히 길을 막는가?”

무왕이 노하여 물었다.

“우리는 고죽국에서 온 백이와 숙제라고 합니다. 주왕이 아무리 방탕한다고 하나 천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신하가 징벌하는 건 불가하옵니다.”

백이와 숙제는 ꡔ사기ꡕ 「열전」의 첫머리를 장식한 의인들로 중국 역사상 가장 어진 현자로 추앙받고 있다.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는 부친의 뜻이 3남인 숙제에게 있음을 알고, 부왕이 죽자 그는 숙제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숨어 버렸다. 숙제 역시 형에게 자리를 돌려주기 위해 임금자리를 마다하고 조국을 떠났다. 제위는 차남에게로 돌아갔고, 숨어 살다가 만난 두 형제는 문왕의 덕치를 듣고 주나라로 찾아온 길이었다. 그러나 예와 덕을 숭상하던 문왕은 이미 죽었고, 과격한 무왕이 제 형과 부친의 복수에 혈안이 되어 출정에 나선 걸 보고 만류하는 것이었다.

“주의 악행이 하늘에 닿아 원성이 누리를 덮었거늘, 어찌하여 그대들은 징벌이 불가하다 하는가?”

두 사람의 품행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 무왕이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물었다.

“폭력으로 폭력을 단죄하는 것은 인(仁) 아니요, 부친의 상도 치르지 않은 채 손에 피를 묻히러 나서는 것은 효(孝)가 아닙니다. 이는 천도에 부합되지 않으니 군사를 돌이키소서.”

천도를 운운하니 무왕은 기가 한풀 꺾였다. 폭군 타도를 빌미로 아버지의 삼년상은커녕 장례도 치르지 않았으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무엄하기 짝이 없구나! 바닷가의 늙은이가 길을 막고 감히 군왕을 훈계하다니, 단칼에 목을 베리라!”

무왕의 시위 장수 하나가 칼을 뽑아 치려고 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칼날이 다가와도 담담하게 무왕의 눈을 응시했다.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한 표정들이었다. 무왕은 그 어떤 명도 내리지 못한 채 지켜볼 뿐이었다. 높이 치켜든 서슬 푸른 칼이 햇살을 받아 쏘며 곧 바람을 가를 태세었다.

“멈추어라!”

무왕 곁에 앉자 있던 강태공이 근엄하게 말했다.

“그 분들이 의인이니라. 예의로써 부축하여 한쪽에 비켜 계시게 하여라.”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무왕을 바라보던 백이와 숙제는 시위 군사들의 완력에 의해 한쪽으로 비켜 서 있게 되었다. 결국 무왕의 정벌 길을 막지 못한 그들이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순절한 것은 이후 유명한 고사(故事)가 되었다.

다시 은의 도성을 향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정벌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며칠째 천둥이 울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군마와 병사들이 모두 후줄근하게 젖어 행군조차 어렵게 되었다. 거센 바람에 깃대가 꺾이고, 무왕의 수레를 끌던 마부가 벼락에 맞아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천제의 뜻이 아직 상(商)을 보우하나 봅니다. 군사를 돌이키심이 어떠하올지요?”

겁에 질린 대신들의 권고에 무왕은 주먹을 불끈 쥐고 치를 떨었다. 가뜩이나 백이와 숙제의 충고로 마음이 뒤숭숭하던 차에 거듭 천지신명의 훼방이 이어지니 자신이 없어졌다.

이를 눈치챈 강태공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무슨 나약한 소리들이오! 하늘이 비를 내리는 것은 우리 군사와 군마를 깨끗이 씻어주기 위함이요, 말몰이꾼이 죽은 것은 그이 부주의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의롭고 폭군은 패덕하니 대의명분에 어긋남이 없소. 작은 시련이 있어도 마땅히 극복하고 진격해야 할 것이오!”

아흔을 바라보는 강태공의 말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러자 희한하게도 비바람이 멎고 구름이 걷히며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무왕과 병사들은 다시 진군을 계속하였다.

“감히 천자의 성을 넘보다니, 용서하지 않으리라!”

무왕의 군대가 도성 쪽으로 밀려오자 주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와 대항하였다. 그가 거느린 군대는 무려 70만 대군이었다.

목야(牧野)라는 넓은 들판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강태공이 훈련시킨 무왕의 군대는 기세도 드높았고, 병법에 부합되는 조직적인 싸움을 전개하였다. 수효가 많기는 했지만 주왕의 군사들은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병사들은 주왕에게 적대감마저 품고 있었으니 전쟁은 하나마나였다. 그들은 돌격 명령이 떨어지자 창칼을 거꾸로 잡고 달려나왔다. 그대로 무왕의 군대에 귀순해버리거나, 오히려 주왕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대세가 기울자 주왕은 자신의 주지육림이 있는 녹대로 달아났다. 전포(戰袍)를 벗어 던진 그는 온갖 옥(玉)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스스로 포격형을 당한 것이다. 그의 몸뚱이는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그런데 옷이 다 탔지만 그의 몸뚱이는 멀쩡하였다. 속옷에 달린 ‘천지옥염(天之玉琰)’이라는 다섯 개의 보옥(寶玉) 덕이었다. 그러나 주왕은 차라리 한줌의 재로 사라지는 게 훨씬 좋았을 것이다. 「주본기」는 그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




무왕은 드디어 성으로 들어가서 주가 죽은 장소에 이르렀다. 그는 직접 주의 시신을 향해서 화살 세 발을 쏜 다음, 마차에서 내려서 경검(輕劍;보검의 이름)으로 시신을 치고, 황색 도끼로 주의 머리를 베어 커다란 백기에 매달았다. 다시 주의 애첩인 두 여자를 찾아가니, 두 여자는 이미 목을 매어 자살한 뒤였다. 무왕은 또 화살 세 발을 쏘고 검으로 치고 흑색 도끼로 목을 베어 작은 백기에 매달았다.


승리한 무왕은 나라를 안정시키기에 나섰다. 도로를 정비하고 불탄 궁궐을 보수하였다. 감옥을 열어 기자를 비롯한 죄수들을 방면하였다. 녹대의 재물을 풀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각각의 공로에 따라 봉읍을 하사하였다. 도망쳐 숨었던 미자로 하여금 은왕조의 대를 잇고 제를 지내게 은전을 베풀었다. 황제를 비롯한 고대 임금의 자손들에게도 봉토를 주었다. 공신과 자신의 형제들은 제후로 삼았다. 비로소 천하의 모습이 바뀌고, 오늘날 어림잡을 수 있는 고대 중국의 윤곽이 잡히게 되었다.

태공 강여상은 영구(營丘; 오늘날의 산동성 일대)에 피봉되었다. 강태공의 세거지를 포함한 곳으로 제나라의 일어남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영지에 부임한 그는 가장 막강한 제후로서 어진 정치를 펼치다가, 100세쯤(113세라는 설도 있음)에 이르러 숨을 거두었다.


태공망 강여상은 여러 모로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 역사적 인물이지만, 행적은 신화적인 냄새가 짙다. 문왕 희창과 태공의 극적인 만남도 신화적으로 채색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사마천은 「제태공세가」에서 위 이야기와 더불어 다음 두가지 설도 함께 실었다.

어떤 이의 말로는, 태공은 박학다식하여 상 주왕을 섬겼으나, 주왕이 포악무도하자 떠났고, 이어 제후들에게 유세하였지만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하였는데, 마침내 서쪽으로 가서 주 서백에게 의지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의 말로는 이러하다. 여상은 처사(處士)로서 바닷가에 숨어 살았는데, 주 서백이 유리에 구금되자 평소 여상을 알고 지내던 산의생과 굉요가 그를 불러냈다.

여상도 “내가 듣기로 서백은 현명하고 어른을 잘 모신다고 하니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하였다고 한다. 이들 세 사람은 미녀와 보물을 구해 죄값으로 바쳐 서백을 주나라로 돌아올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강태공에게는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의 잔영이 남아 있다.

이윤은 성탕을 도와 하를 멸하고 은을 일으킨 명재상이었다. 그는 한때 걸왕을 섬겼는데, 패덕한 걸이 그의 주청을 가납하지 않자 성탕에게로 갔다. 어쩌면 여상도 주왕을 받들다가 그의 패덕을 보고 스스로 낙향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이윤이 요리사가 되어 성탕에게 접근하였는데, 여상은 조도(釣道)을 설하며 문왕과 교분을 맺었다.

부열은 은나라 고종의 치세에 중용된 인물이다. ꡔ서경ꡕ 「상서」에 따르면, 치세가 순탄치 않음을 고민하던 고종이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상제(上帝)가 현몽하여 보필할 인재를 소개해 주었다. 고종은 꿈에서 소개 받은 사람의 초상을 그려서 찾게 하였다. 얼마 후 부암이라는 들에서 흙일을 하는 자가 초상과 일치하여 재상으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부열이었다.

이처럼 강태공에게는 많은 전설이 가탁된 흔적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제나라의 시조이며 역사의 새 장을 연 인물이지 결코 전설 속의 영웅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남긴 치적에 비해 후세의 평가는 축소된 느낌마저 있다.

강태공은 천하를 평정하는 데는 병법과 술수만으로 하지 않았다. 그는 문왕과 무왕으로 스승으로써 군왕의 도리와 치정(治政)에 대해 조목조목 가르쳤다.

놀라운 것은 그의 가르침이 천도에 부합되려 한다는 점이다. 1세기 전만 하더라도 공부(工夫)의 첫마당이 된 책 ꡔ명심보감ꡕ을 보라. 공자의 가르침이 두드러진 듯하지만, 실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는 놀랍게도 강태공이다.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하고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하라. 즉 참외밭에서는 신발 끈을 매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는 관을 고쳐 쓰지 말라, 는 유명한 말도 ‘태공 왈’ 하고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계선」, 「천명」, 「입교」, 「치가」 등 거의 전편에 걸쳐 그의 가르침이 산재해 있다.

다소 의아스런 사실이지만, 거슬러 따져보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유학의 비조(鼻祖)는 누구나 알 듯이 공자(孔子)이지만,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편 것보다는 성현의 유훈을 정리한 공이 더 컸다. 공맹의 가르침의 시원은 주공(周公) 단(旦)에게서 찾는다.

주공이 누구인가?

그는 무왕 발의 아우이다. 무왕이 태자로서 여상에게 수업받을 때 주공 역시 함께 배웠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다. 무왕은 주왕을 토벌하고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는데, 그는 임종을 맞아 공덕이 높은 주공에게 양위하려 했다. 태자가 너무 미숙하였기 때문이었다.

주공은 섭정을 단행했으나 천자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권좌를 안정시킨 다음 성왕이 장성하자 미련없이 보위를 돌려 주었다. 주나라를 천자의 나라가 되게 한 이는 무왕이었지만, 법도를 세우고 덕의 교화를 펼쳐 천하 제후들이 따르게 한 이는 실로 주공이었다. 그러한 주공의 어진 행실과 덕치가 강태공의 가르침에서 나왔다는 건 의심할 바가 없다. 또한 노나라는 주공을 봉한 땅이니, 후세의 노나라 사람인 공자가 주공을 받드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후세에 전해지는 책을 보면 강태공을 주공에 비겨 매우 폄하시키고 있다. 주공은 예와 덕을 숭상하는데 비해 강태공은 과격하고 무와 술책을 숭상하는 쪽으로 편집되어 있다. 전한(前漢)의 대유(大儒) 유향(劉向)이 펴낸 ꡔ설원ꡕ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태공에게 물었다.

“은의 많은 선비와 군중을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태공의 대답은 과감했다.

“우리의 적수였던 자들은 남김없이 죽이는 게 어떨까요?”

무왕은 안 된다고 딱 잘라 거부하고 소공을 불러 물었다.

“죄 있는 자는 죽이고 죄 없는 자는 살려 주심이 어떨까요?”

소공이 말했다.

이번에도 무왕은 안 된다고 했다.

이어 무왕은 주공 단에게 같은 말을 물었다.

“모두들 그 전과 같이 살면서 밭 가는 이는 밭을 갈게 하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도록 하고, 오직 인(仁)으로 하시면 친하여 올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과실이 있으면 이는 오직 나 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무왕이 감탄하여 말했다.

“넓도다. 천하를 평안케 하는 말이여!”

ꡔ사기ꡕ의 기록에 비추어 봐도 강태공이 다소 과격한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이는 일의 되고 안 됨을 이미 간파하고 몰아부치는 혜안에 근거하여 순리에 따른 것이지, 결코 무정하거나 포악한 건 아니었다. ꡔ육도삼략ꡕ에는 태공이 인의로써 천하를 다스릴 것을 권고하며 가르치고 있음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강태공은 문왕의 스승이요, 무왕에게는 사상보(師尙父)가 된다. 그런데 어찌 무왕의 아우에게 비견되어 폄하되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혹 훗날 유자(儒子)들이 비조인 주공을 받드느라 생긴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강태공의 대단한 점은 천명을 스스로 만든 위인이라는 데 있다.

무왕의 봉기는 일종의 역성혁명이요, 복수의 길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대목들이 있다. 전설도 아닌 ꡔ사기ꡕ에 번번이 무왕의 장도를 좌절시키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천명(天命)을 빙자한 일종의 자연 재해이다.

첫 번째 원정은 하늘에서 불덩이 떨어지는 바람에 철군하였다. 2년 뒤 두 번째 원정에서는 점괘도 나빴고, 벼락과 비바람이 길을 막았다. 무왕과 대신들은 겁을 먹고 낙담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강태공은 과감히 그것을 떨치고 은나라로 진격했다. 불길한 점괘나 자연 재해도 그의 기백 앞에 눈처럼 녹아지고, 마침내 대업은 이루어졌다.

천하를 경영하는 데는 천시와 지리도 중요하고, 대의명분이 분명해야 한다. 전략과 전술로 싸워 굴복시킬 힘도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갖추어져도 결국 대업을 이루는 원동력은 ‘기백과 용기’라는 걸 백발의 강태공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무왕의 길을 가로막은 조짐들은 과연 자연 재해에 지나지 않는 일인가?

사실을 말하기 곤란한 일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건 아닐까?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춘추필법의 속성으로 볼 때 직설(直說)이 곤란한 일을 발췌, 상징화 했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ꡔ중국 고대 신화ꡕ는 자연 재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준다.

하와 은나라는 중국 중앙을 지배하며 많은 제후를 거느린 천자(天子)의 나라였다. 오늘날 시각으로 보자면 ‘천자’라는 말 자체는 매우 권위적이며 선민 의식에 사로잡힌 둣이 보인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천자’가 있으니 그 아버지 뻘인 천부(天父)가 있을 법하다. 상기 책은 천부, 곧 천제(天帝)가 그저 옥황상제나 막연한 하느님이 아님을 보여준다.

천제는 어딘가에 실존하고, 그의 군사력은 상상을 넘어서는 위력을 가진 것이다. 그가 무왕의 정벌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 그 군대의 장수는 오방대신(五方大臣)을 비롯한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들이었다. 불덩이, 비바람, 벼락 같은 자연 재해들은 실상 풍백과 우사의 법력으로 짐작된다. 이러면 이야기는 신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기록은 분명 역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겁을 먹은 무왕은 운사와 풍백을 만나기를 몹시 꺼렸다. 이에 강태공이 나서서 그들을 회유하여 환심을 산 다음, 허락을 얻고서야 본격적으로 상나라로 쳐들어갔다. 간신히 천제의 허락을 얻어 주왕을 타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주왕도 뭔가 확실히 믿는 바가 있었기에 그토록 오만 방자했던 것이다. 무왕과 강태공은 이미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한 주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천자를 임명한 천제가 무서워서 망설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왕은 폭군 주를 토벌하고 나서도 매우 불안해 한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ꡔ사기ꡕ의 다음 기록은 무왕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하늘이 주나라를 보우하시는지 아닌지 아직 확신할 수 없는데, 어찌 잠잘 겨를이 있겠소? 하늘이 반드시 주나라를 보우하여 천하의 사람들이 천실(天室)을 따르도록 하리라.




무왕은 역성 혁명을 천제에게 승인받지 못할까 매우 전전긍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천제가 그저 막연한 신적인 존재나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처럼 골몰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천제의 힘이라면 언제든지 주나라를 쓸어버릴 실질적인 힘을 가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사가들은 위 말을 새로이 천자의 나라가 된 주왕조에 모든 백성이 충성을 바치자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정황으로 보나 문장으로 보나 어폐가 있다. 이는 천자가 아니라 천제에 대한 충성 다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ꡔ시경ꡕ 「대아」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위대하신 하느님이 위엄있게 이 땅에 강림하시어

온 천하 보살펴 백성의 편안을 구하셨네

하나라 은나라가 정사를 그르치니

저 사방 나라에서 이에 살피고 꾀하셨네

(후략)




위 시는 주공이 문왕의 덕과 치적을 찬미하여 지었다는 해설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문왕이 하늘에서 강림한 상제란 말인가. 또 문왕이 하나라의 일까지 관계했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자의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명시된 뜻대로 유추하자면, 분명 천제가 존재하고, 하와 은의 덕이 쇠하자 천제가 사방 열국에 명하여 힘으로 왕조를 교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무왕은 자신의 덕이 천제에 부합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무왕을 떨게 한 천제는 누구인가?

그 천제의 나라는 어디인가?

무척 흥미로운 일이나, 지금 사료(史料)로서는 답할 길이 없다. 이런 까닭에 강태공을 신화와 역사의 분수령에 서 있다고 소제(小題)를 붙여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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