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황산벌 전투의 날~ 계백장군 영전에 엎드려,,
말복 더위가 사람을 잡을 기세다. 이럴 때는 시원한 그늘이나 에어컨 바람을 쐬며 인생사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피서 아니겠나? 텅빈 생각은 타임머신을 타고 1339년 전인 서기 680년 당시 황산벌로 날아가 보자. 스토리는 삼국사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음력 7월9일 (올해는 양력 8월9일) 김유신의 5만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달하니 백제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세군데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황산벌 전투를 이렇게 시작되었다. 계백의 5천 결사대는 신라 5만군의 다섯 번째 총공세에 무너지고 만다. 나라를 지키다 장렬하게 죽어간 계백과 5천 결사대의 뜻을 기리고자 계백장군 묘소에 참배를 하였다.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등극한지 7년차. 두 여왕 - 선덕여왕,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성골 출신이 없는 신라는 부득이 진골 출신 김춘추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김춘추를 시기하고 반발하는 쿠데타도 있었지만 어렵게 왕위를 지켜온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진골 출신도 성골 못지않게 왕 노릇을 잘 할 수 있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왕이 되기 전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왕 의자에게 딸과 사위(성주 김품석)를 잃은 원한도 갚아야하기 때문에 더욱 절치부심하였다. 결국 백제를 멸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제를 멸하기에 신라는 국력이 부족하여 외부의 지원을 필요로 하였다. 고구려로 원병을 청하러 갔다가 구금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그는 바다 건너 당나라에 눈을 돌렸다.
당나라 황실은 고구려를 점령하려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왼쪽 눈을 잃은 당태종 이세민의 후예들로서 기필코 조선반도를 점령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당나라와 신라의 속셈은 달랐지만 야합이 성사되어 <나당연합군>으로 발전된 것이다.
서기 660년, 모내기를 서둘러 끝낸 신라는 주력군인 농민군을 포함한 5만 병력의 총동원령을 내려서 상주 금돌성으로 집결을 명하였다. 그래놓고 무열왕 김춘추는 태자 법민(문무왕), 사령관 김유신 등과 함께 5월26일(양력 6월28일) 경주를 출발하여 소정방과 연합작전회의를 하기 위해 경기도 이천으로 출발하였다.
20여일이 지난 6월18일(양력 7월20일) 경기도 이천에 도착하여 남천정에 임시 행궁을 마련한 김춘추는 태자 법민과 김유신으로 하여금 서해 덕물도(덕적도)로 가서 소정방과 나당연합회의를 지시하고 행궁에 머물렀다.
6월21일 태재 법민과 김유신은 병선 100여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만났다. 정방은 “나는 7월10일(얄력8월10일)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를 만나 백제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라고 나당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전략지침을 하달하였다.
김유신이 돌아오자 김춘추는 파발마를 보내 상주 금돌성에 집결하여 훈련 중인 5만군으로 하여금 사비성으로 진군을 명하고 본인은 상주 금돌성으로 행궁을 이동하는 한편 김유신 등 전쟁지휘부로 하여금 말을 달려 신속히 5만 본진에 합류할 것을 명하였다.
탄현을 거쳐 7월9일(양력 8월9일) 김유신의 신라군이 황산벌에 이르니 백제 장군 계백이 이미 도착하여 3곳에 나누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군의 연이은 공세를 꿋꿋하게 막아낸 백제군은 결국 다섯 번째 총공세에 5천 결사대는 20여명의 생존자를 남기고 옥쇄(=전멸)한다. 그날이 음력 7월9일 올해는 양력으로 8월9일이다.
황산벌에서 수비를 하던 백제의 5천 결사대가 옥쇄하였다면 공격하는 신라군은 더 많은 사상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치중(보급과 정비, 수송)을 담당했던 동원·징발된 근로대까지 감안하면 최소 2만에서 3만의 백제와 신라의 군인과 근로대, 인근 고을의 주민과 아녀자들이 죽어갔을 황산벌전투~~
그곳에는 7백의 총, 9백의 총, 만인의 총 등 전국에 흔하디흔한 총 하나를 만들지 못하고 영혼들은 구천을 떠돌게 하고 있다. 안타깝고 서럽다. 이 땅에서 후손들이 계백장군과 그장좋들이 눈을 감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기 1339년을 이렇게 염치없이 살아도 되는가 싶다~!!
전낙운 전 충남도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