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겸전의 명장, 조선조 이삼[李森]장군- 상월면 주곡리 백일헌 고택 ,사적공원으로 가꾸자 여론 팽배
조선조 성리학이 극성했던 시절, 효행과 학행으로 이름을 떨친 문신 학자들의 숨결이 그득한 논산이다, 공자의 영당을 모신 노성궐리사 노성, 은진,연산의 3향교 , 돈암서원 노강서원을 비롯한 열 곳의 서원 등 가는 곳마다 명현 거유의 숨결은 오늘 논산인의 혈맥에 맥맥히 살아 약동한다,
논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조선성리학을 사람의 도리를 밝히는 예학으로 재정립했대서 조선예학의 종장으로 일컬어지는 사계 김장생 선생 그아드님 신독재 김집 선생 그문하의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윤증 선생 등 학문적 일가를 이룬 당대 석학들의 삶의 궤적을 더듬는 발길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태생으로 일찍이 명재 윤증선생으로부터 학문적인 가르침을 받고 무관으로도 명성을 떨친 이삼[李森]대장군의 충의[忠義 ]로운 삶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영조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상월면 주곡리 백일헌 고택에 대한 사적공원 지정과 더불어 지자체의 아주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무성하다,
기록에 의하면 장군은 소년시절 명재 윤증선생에게 수학했는데, 선생이 공의 절구 시를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장수와 재상의 기개가 있다’고 하며, 당나라 시에 있는 ‘병위삼’이란 구절의 뜻을 인용하여 이름을 삼[森]이라 지어주었다고 돼 있다,
.
또 숙종때 계미년 봄에 숙종께서 친히 활터에 가서 살펴볼 때, 공이 첫째 자리를 차지하므로, 용수를 쏘아보라고 명하니 다섯 번 쏘아 다섯 번 맞추거늘, 왕이 크게 기뻐하고 곧 전시에 나가보라고 명하고, 직접 표범 가죽을 하사하고, 격려함이 심히 진지하였고 이때부터 날마다 손에는 활깍지를 항상 끼고, 입에는 국을 대지 않으며 말하기를, ‘손이 둔하면 능히 활을 쏘지 못하며, 몸이 살이 찌면 능히 날쌔지 못하다’라며,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기로 스스로 다짐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장군이 적과 싸워 개선해 돌아오는 현장에서 왕이 직접 성문에 가서, 적의 머리 벤 것을 받으며, 군대의 모습이 정리되고 엄숙함을 보고 공을 지목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훌륭한 장수이다.’ 하였다.는 기록에서 보듯 장군은 당대에 보기드물게 문무를 겸전한 명장의 풍모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또 비문에 " 공은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고, 비범하며, 성품이 강직하고 민첩하며, 두 어깨가 우뚝 솟아 송골매 같아서 항상 말 고삐를 잡고 진영에 오르면, 보는 자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고 새겨진 내용으로 미루어 장군의 위용은 당대 으뜸의 비범함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을 기려 영조임금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장군의 고택은 충청남도 민속자료 7호로 지정돼 있으며 현재는 혐평이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여러 기록에 나타나듯 효행 또한 지극했고 나라를 위한 충성심 또한 비견 무쌍 한 것으로 알려진 장군의 체취가 느껴지는 백일헌 고택은 그래서 논산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숨결로 다가선다.
그러나 고택을 직접 관리하는 논산시의 성의 없음은 고택 입구 우편의 폐가를 십수년 째 방치해 뜻있는 이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가하면 장군의 유품관리에 한계를 느낀 후손들로 하여금 고택에서 관리해 오던 장군의 영정 등 유품을 스스로 보존케 하지 못하고 백제 군사박물관에 기탁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
고택으로 들어서는 도로를 넓히고 주변에 대한 정비사업 계획을 세워서 사적 공원으로 가꾸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마을 주민들의 의견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열배가 넘는 적군과 싸우다 황산벌 고혼이 된 백제 계백대장군의 충의에 비견 될 만큼 이삼장군의 삶의 궤적 또한 크게 드러내 보일 때다 지금이,,,
영조조에 수원부사와 정주, 양주목사와 호남좌수사와 영좌, 호서, 남관, 서관병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는 선전관, 도총부경력, 훈련정, 내금장, 금군별장, 포도대장, 한성좌우윤, 형조참판, 총융사, 어영훈련대장,을 지낸 문무겸전의 이삼장군, 그 숨결이 머문 상월면 주곡리 나라를 위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하사받은 장군의 고택은 아주 특별한 체취로 우리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