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 박정희 정권 말기.. 영구집권을 꽈하는 독재정권의 폭압정치는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였다,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고 민주회복을 갈망하는 양심세력은 독재정권 종식을 위한 치열한 민주화 투쟁을 전개했다.
아마도 그때 필자는 스물 일곱 살 때였다,
정치가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 ,, 잘 정돈된 논리적 헤아림이 있을리 없다, 그저 맨몸의 젊은 혈기에 몸을 맡겼던 시절 ,, 이미 정신적 지주였던 김대중 선생의 지향을 최고 선으로 받아들였고 마침내 반독재 세력의 중심적 조직체인 민주헌정동지회 논산군 책임자로 이름을 올렸다.
단순히 “ 박정희 독재정권은 이제 그만 ! ” 이라는 불평 한마디만 해도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만 했던 시절에 논산시 면면촌촌을 돌며 반대운동을 조직화 하는 필자의 몸이 성 할리 없었다.
1979년 지금은 사라진 반월동의 대흥다방에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필자는 미행하던 5-6명의 경찰관에 의해 끌려갔다.
내가 접선했던 그리고 민주헌정동지회 가입을 약속했던 부적의 서주원 선배 [작고] 노성의 문기범 선배 [작고] 들도 경찰의 조사대상에 올랐고 필자는 이틀 뒤 대전 중부서로 넘겨졌다,
충남도 관내에서 수십명의 조직선이 검거 됐으나 충청권 민주화 운동의 대부였던 고 송좌빈 선생과 필자 두 사람만 재판에 넘겨졌다.
이른바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죄였다.
대전지방법원은 필자에게 징역 2년6월 자격정지 2년, 송좌빈 선생에게는 징역 1년6월을 선고 했다.
당시 변호를 맡아줬던 이돈명 변호사 들 변호인단들의 항소 권유를 받아들여 서울고법으로 항소 함에 따라 대전교도소에서 영등포 구치소로 다시 거처를 옮겨 수용됐다.
감옥 생활도 여럿이 함께 지내는 혼거가 아닌 나홀로의 독방생활은 곱징역으로 불리울 만큼 처절한 고독감에 견디기 어려웠고 좁디좁은 독방은 햇빛 조차 들어오지 않는 누워도 한방 서도 한방 않아도 한방 일만큼 좁디 좁은 지옥 같은 곳이었다.
그러다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목숨을 앗기고 그해 12월 긴급조치 해제로 인한 면소판결로 인해 감옥문을 나섰다.
그 후 김대중 정부는 대통령 직속기구로 소위 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 라는걸 만들어 민주화운동과정에서 고초를 겪은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이유로 엄정한 심의를 거쳐 민주화 투쟁대열에 합류해 감옥에 던져졌던 이들 상당수에게 “민주화 운동 관련자 ” 라는 야릇한 증서를 보냈다.
증서의 요지는 투쟁과정에서 겪은 감옥 생활은 대한민국의 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후속조치로 구금일수를 선정한 형사보상금을 지급했다.
그 뿐이었다.
당시 억울하게 형옥의 길을 경험한 민주화 투쟁 동지들 그 누구도 거창한 민주유공자의 지위를 요구하거나 특정한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민주화 투쟁대열에 몸담았던 이들이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한 “ 대통령긴급조치 9호 ” 라는 그 족쇄를 풀었고 그 법의 효력 상실로 면소 판결을 했으니 만큼 전과 이력을 삭제해 달라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주장을 하고 있을 뿐인데도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에 이르는 네 번의 정권이 바뀌면서도 한결같이 마이동풍이다.
문제는 같은 이유로 감옥에 같혔던 유력한 인사들은 개인적으로 변호사를 선임해 긴급조치 9호에 의한 전과에 대한 무죄 청구를 해서 승소함으로서 전과 기록도 삭제하고 또 상당한 보상액도 받아낸다는 것이다.
한 세상 살다보면 어느 사람이라도 호 불호[好 ,不好의 ] 양측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마련이다.
30년 세월이 훨씬 넘은 지금 사람들 거대분은 당시의 시정이 어떤지 헤아리기 어렵다 , 단지 누군가 필자를 지칭해 “ 아무개는 징역살이한 전과자 라네 ” 한마디 내뱉으면 단지 그 기록상의 문구 하나로 사회속성상 기피 인물로 분류되는 전과자로 불리우기 십 상이다,
국민의 촛불 민심으로 역사의 새 지평을 연 문재인정부 ,,,, 지금도 정부산하에 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 라는 기구가 존속하고 있으니 만큼 억울해 하는 상당수 민주화운동관련자 들의 억울한 사정을 보듬어 민주화운동관련자 들의 전과기록 삭제라는 적정한 조치를 취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