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을 모았던 충청유교문화원 건립 부지가 노성면 병사리 일원으로 최종 결론났다. 심의위원회는 9월 16일 오후 4시 논산시청 상황실에서 2차 심의워원회를 열어 노성과 연산 두곳을 상대로 표결을 실시해 10대 3으로 노성병사리 종학당 인근 수변으로 결정했다.
이날 표결에는 20명으로 구성된 심의위원중 위원장인 임승빈 교수를 비롯 13명의 위원이 표결에 참여 했다.
이로 해서 건립 부지 선정문제는 일단락 됐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국비 20억이 깍이는 등 수모를 겪은 충청유교문화원 건립 사업은 뒤늦게나 본 궤도에 오를 전망이다.
그러나 탈락한 연산 돈암서원 중심의 유림들의 반발 강도가 만만찮을 것으로 보여 파장이 만만치 않을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더욱 해당부서장이 그동안 연산 돈암서원 유치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해 왔던 연산 쪽 유림들을 상대로 " 이번에 양보하면 유교문화권 개발과 관련한 후속사업을 " 몰빵" 으로 몰아주겠다. 필요하다면 시장의 각서 까지 써 줄 용의가 있다고 회유 했던 것으로 밝혀져 물의를 빚고 있다.
이는 시가 당초 노성측에 건립을 추진하다 연산쪽 유림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뒤늦게 중의를 수렴한다면서 심의위를 구성하는 모양새를 갖추는 등 사실상 연산쪽 인사들을 들러리로 내세운 꼼수에 다름 아니라는 연산쪽 유림들의 비난이 거세다.
한편 이날 시청 상황실 인근에 모여 최종 결과를 기다리던 김용원 김준수 김용성 등 연산 측 유림 대표들은 허탈해 하면서도 충청유교문화원의 연산 유치를 주장해온 인사들과 회동, 향후 입장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간 노성 연산 양측 주민들의 피말리는 유치전으로 곤혹스런 입장이던 논산시로서는 사업의 지지부진으로 인한 사업의 무산은 막아 , 일단 급한불은 껏지만 연산 양촌 등 지역주민들은 물론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선생을 존숭하는 지역 유림들의 반발을 어떻게 잠재울지가 당장의 숙제로 남았다.
성리학은 유교의 한 갈래로써 송나라의 주희가 만든 학문으로써 유교의 다른 학문보다 철학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경향이 높았다. 그러다보니 타 학문에 대한 배척이 강했고, 조선이 성리학을 믿고 기본사상이 된 이후, 무려 500년동안 성리학이 조선내에 유지될 수 잇었던 것은 성리학의 배타성 덕분이었다.
조선 중기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일본군의 침입으로 인해 도성이 함락당하고 말았다. 일국의 수도가 외적에게 짓밟히는 수모를 당했음에도 조선은 그 이후 어떤 거 하나 개선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더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면서 학문의 발달에 저해를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모든 양반들이 성리학만을 신봉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중기에 들어오기 시작한 왕수인의 양명학은 북인이나 남인에게 영향을 미치고도 했다. 화담 서경덕의 제자인 남언경이나 이요는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로써 그 명성을 날렸고,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도 양명학을 수용하고, 불교와 도교를 신봉하면서 성리학자로부터 괴물이라는 지탄을 받기도 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도 성리학만이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생각한 성리학자들이었기 전혀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성리학의 최고봉에 서있던 송시열에게 주자와 동열인 송자(宋子)라고 붙일 정도였으나, 이런 송자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윤휴와 윤증이었다. 윤휴는 주자와 해석을 달리 하여 그 충돌이 이미 예고된 상태였다.
비록 윤휴가 남인이라고 하지만, 송시열과 친구지간이었고, 윤휴의 학식도 송시열이 이미 인정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윤휴의 해석이 주자와 틀리자, 그들은 서로 갈라섰을 수밖에 없었다. <논어> 향당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廐焚, 子退朝, 曰 : '傷人乎? 不問馬." 이 말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마굿간에 불이 났다. 공자께서 조정에서 퇴청하시어 말씀하시길 "사람은 다치지 않았느냐? 말에 대해선 묻지 않으셨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주자는 이 해석에서 공자께서 말을 사랑치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이 상했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많았기 때문에 물어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라 하고, 대개 사람을 귀히 여기고 가축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양명학의 왕양명은 이를 "廐焚, 子退朝, 曰 : '傷人乎不?' 問馬."로 보아, 뒷부분을 "사람이 다치지 않았느냐? 하시고는 말을 물으셨다."고 풀이하였다. 앞서는 사람만 묻고 말은 묻지 않은 것이었는데, 띄어쓰기를 이렇게 하고 보니, 사람을 먼저 묻고 나서 말을 나중 물으신 것이 된다. 윤휴는 왕양명의 학설을 채택하여 수용한 바, 당시 조선 주자학의 반발을 사게 된 것이다.
단지 해석의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파장은 컸다. 갈릴레이같은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들이 로마 교황청의 노여움을 사, 종교재판을 받았듯, 주자학자들은 윤휴를 사문난적(글로써 세상을 어지럽힌 자)로 규정하여 그를 주자에 대한 역적이라고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윤휴는 즉각 반발에 나선다. "그대들은 공자의 뜻을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윤휴의 해석은 결국 자신마저 죽음에 몰아넣는 비극을 초래한다. 비록 남인이 몰락했던 삼복의 난으로 인하여 사약을 받아 죽었긴 하지만, 주자학의 권위에 도전한 만큼, 조선 사회에서 그가 자리잡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명제 윤증은 강화도에서 살아돌아온 윤선거의 아들이었다. 윤선거는 송시열과 동문수학한 사람으로써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자,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는데, 친구들은 모두 죽고, 아내도 자결했음에도 자신만 혼자 돌아와 세인들로부터 비겁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그 후 윤선거는 본의아니게 윤휴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당시 윤휴와 송시열의 대립은 정국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시끄러웠다. 당시 윤선거는 윤휴를 옹호하는 뉘앙스를 띄었다가 단번에 송시열에게 추궁을 받게 된다. "그대는 주자가 옳다고 보는가? 윤휴가 옳다고 보는가?" 조선에서 주자를 지지하지 않으면 역적이 되는 가운데, 윤선거는 도리없이 주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송시열도 이 선택으로 윤선거가 윤휴와 결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윤선거가 죽은 후, 윤휴와 나눈 서신이 등장하자, 송시열은 그가 윤휴의 학설을 동조한 것으로 오해한다. 윤증은 송시열의 수제자였다.
송시열이 출타했을때는 그가 대리스승 노릇도 한 인물이었는데, 그가 얼마나 학식이 뛰어난지 짐작하게 해준다.
그가 송시열과 대립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인 윤선거 사후 송시열이 묘갈명(묘비에 들어갈 글들을 말한다.죽은 사람의 생애에 대해서 기술한다.)에 병자호란때의 일을 기술하자, 윤증은 송시열에게 시정을 요구했으나 고칠 수 없다고 버텼다. 심지어 송시열이 유배한 곳까지 같이 갔는데도 결국 고치지 못했다. 결국 윤증은 송시열과의 인연을 끊기로 작심하고, 벼슬길을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어 송시열의 북벌론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 것인지를 폭로했다. 이 사건으로 송시열과 윤증의 인연은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 경신대출척때 서인은 남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김익훈으로 하여금 역모죄를 조작하게 된다. 그 사건으로 남인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고, 남인과 서인은 돌아설 수 없는 길로 가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익훈의 무고 행위가 들어나게 되고, 김익훈에 대한 처벌 논의가 일어나게 된다.
서인 소장파들은 조정에 명을 받고 올라온 송시열에게 김익훈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렇지만, 송시열은 숙종과 만나는 자리에서 "스승인 김장생의 아들인 김익훈을 가르친 자신의 잘못"이라고 김익훈을 옹호했다. 당시 국왕보다 더 한 권세를 휘두른 송시열을 처벌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유야무야되어가고, 소장파들은 송시열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게 된다. 당시 조정의 명을 받고 올라오던 윤증은 양주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친구인 박세채가 조정에 출사할 것을 종용하자, 윤증은 조정에 출사하려면 세가지 조건이 이루어져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송시열,김만기, 김석주등의 세도가 바뀌어야 하며, 서인과 남인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같은 사대부들끼리 피를 흘리는 정쟁을 극히 혐오했다. 따라서 통합 정치를 통해서 남인과 서인이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서인 노장파의 반발을 사게 되고, 윤증은 서인 소장파의 지지를 받아 소론의 영수가 된다. 하지만 그는 평생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숙종은 그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음에도 우의정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반면 스승인 송시열은 조정과 회덕을 들락나락거리며 조정을 손에 쥐고 흔들다가 결국 기해환국때 비참한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