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0년 이상된 버드나무 수년전 태풍에 원줄기 훼손 방치땐 페사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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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세조때 내려진 연산면 고정리 소재 양천허씨 정려각의 건립과 함께 곁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수령 600년을 훨씬 넘은 버드나무가 수년전 태풍에 원줄기 한가지가 부러져 나가고 돌보는 손길없이 방치되고 있어 이대로 버려둘 경우 머잖아 폐사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더욱 정려각의 수호목처럼 수백년을 버텨온 이 버드나무는 수백년동안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염원하는 마을 주민들의 소망을 비는 민속 신앙의 제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 마을 주민들은 가능하면 충남도나 논산시에서 보호수로 지정 관리해줄것을 바라고 있다.
이 버드나무 옆에 건립돼 보존돼오고 있는 정려각의 주인공은 조선조 광산김씨 문중을 중흥시킨 양천허씨로 고려말 개성윤공 허교(開城尹公許僑)의 손녀이며 부친은 조선조 태종때의 대사헌 허응(許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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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검열을 지낸 김문(金問)이며시아버지는 관찰사를 지낸 김약채(金若采)이다.
양천 허씨는 열일곱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었으니 친정부모께서 가엾이 여겨 개가(改嫁)시키려 하였다.(당시에는 개가하는 제도가 있었다고 함.) 그러나 할머니는 한사코 마다하시며 유복자(遺腹子)를 가진 몸으로 몸종 하나를 데리고 개성에서 시댁이 있는머나먼 충청도 논산시 연산(連山)면 까지 그것도 밤에만 걸어서 가는데 큰 호랑이가 계속해서 할머니를 호위 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더욱 전란을 통해 수백리길을 걸어 시댁에 당도한 허씨 할머니를 시댁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허씨 할머니는 눈내리는 추운 겨울날 대문밖에서 결백함을 주장하며 자리를 뜨지 않았고 다음날 아침 집안 사람들이 문을 열고 바라보니 밤새내린 눈이 사방에 소복히 쌓여 있는데도 허씨 할머니가 꿇어 엎드려 있던 자리에는 눈이 내린 흔적이 없어 시댁 어른들이 감복했다는 이야기도 구전돼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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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허씨부인이 유복자인 철산(鐵山)을 낳았고 훗날 철산은 좌의정 김국광(金國光) 과 참찬 김겸광(金謙光)등을 낳으니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은 국광의 5세손이 된다.
세종대왕이 할머니의 장한 행실을 듣고 정려를 명하니 할머니 나이 43세 때였다.명정(命旌)은 사후에 내리는 것이 통상례이나 이는 특수한 사례이다.세종실록에 의하면 260여명의 효열포상이 상신되었으나 엄선하여 26명을
포상하였으니 정경부인 양천허씨 할머니가 포함되었다.
그후 후손들이 현달하여 광산김씨의 중흥을 이루었다.
그 외 김집,김반 등 조선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게 되니 모두가 陽川許氏 할머니로부터 연유함이다.
따라서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허씨(許氏) 할머니를 중시조 할머니로 모시고 그 묘역(墓域)도
훌륭하게 다듬어 놓았다. 세조때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묘 앞에는 위에 적은 내용을 돌에 새긴 비(碑)가 있다.
양천허씨이자 김씨문중의 며느리인 할머니의 묘갈은 후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지었고
정려 중수기는 후손 김지수(金志洙)가 지었으며 사실이 여지승람과 삼강행실록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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