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진혁(30·현대제철)이 한국 양궁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남자 개인전 금메달을 따냈다.
오진혁은 3일(이하 한국시간) 영국 런던 로즈 크리켓 그라운드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양궁 남자 개인전 결승에서 일본의 후루카와 타카하라를 세트포인트로 7-1로 여유 있게 제쳤다.
한국 남자 양궁 24년의 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지난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재도입된 양궁은 80년대로 접어들며 한국의 독주가 시작됐다. 남자 대표팀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3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유독 개인전에서는 금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박성수가 아쉽게 은메달에 머문 한국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각각 정재헌과 박경모가 우승 문턱에서 좌절한 바 있다. 오진혁이 따낸 금메달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이번 결승전은 한일전으로 펼쳐져 보다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상대는 일본 양궁의 대들보 후루카와였지만 오진혁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번 올림픽, 무엇보다 결승전에 임하는 양 선수의 각오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오진혁에게는 절박함이 있었다. 한국은 이번 개인전에 오진혁을 비롯해 세계랭킹 2위 임동현과 단체전 동메달의 주역 김법민이 모두 참가했지만 세트제에 이은 슛오프 방식의 희생양이 되며 줄줄이 탈락 고배를 마셨다.
이 가운데 임동현의 조기 탈락은 오진혁에게 상당한 자극이 됐다. 임동현은 랭킹 라운드에서 1위를 차지, 개인전 첫 금메달 획득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이번 대회 최고의 샛별로 떠오른 네덜란드의 릭 판데르 벤(세계랭킹 20위)의 돌풍에 휩쓸려 16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임동현이 짊어진 짐은 오진혁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김법민까지 8강에서 떨어진 상황에서 생존해 있던 선수는 오진혁 단 한 명. 사실 오진혁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8강에서 지난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빅토르 루반을 손쉽게 제압한데 이어 4강에서도 중국의 다이 지아지앙을 슛오프 끝에 물리치며 극적으로 결승에 올랐다.
반면, 일본의 후루카와는 기량 이상의 선전을 펼쳤다. 세계 랭킹 32위인 후루카와는 랭킹라운드에서 679점을 기록, 5번 시드를 받는데 이어 32강에서 우크라이나의 드미트로 흐라초프(세계랭킹 3위)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후루카와의 상승세는 8강에서 만난 말레이시아의 모하메드 아누아르(세계랭킹 5위)를 넘어 릭 판데르 벤마저 잠재웠다.
하지만 결승진출은 후루카와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쾌거였다. 실제로 일본은 ‘양궁 전설’ 미치나가 히로시가 두 차례 은메달을 따낸 이후 올림픽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미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후루카와로서는 결승진출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던 상황.
후루카와는 지난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당시 한국 양궁에 대해 “너무 강하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며 “일본은 한국, 중국 다음으로 인도와 No.3를 다투는 실정이다. 특히 한국 선수들은 테크닉과 큰 경기 경험이 최고”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바 있다. ‘공한증’이 엄습한 후루카와가 이번 결승서 제대로 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금메달 희비가 엇갈린 순간에도 후루카와와 야마다 히데아키 감독의 얼굴에는 패배의 아쉬움보다 당연한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시상식에서 오진혁에 악수를 건네던 후루카와의 눈빛에는 한국 양궁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논산시 연무읍 출신인 오진혁 선수는 1981년 8월생으로 연무중앙초∼연무중∼충남체고∼한일장신대를 졸업 하고 현재 현대제철 소속으로 2010광저우아시안게임 단체전 금, 2011세계양궁선수권 단체전 금·개인전 은, 2011프레올림픽 단체전 동, 2012런던올림픽 단체전 동메달을 따낸바 있다.
|
|